특집

[가족의 인연을 하느님께로] (3) 성 이호영·성 이 아가타 남매

이주연 기자
입력일 2019-09-24 수정일 2019-09-24 발행일 2019-09-29 제 3163호 4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한날한시에 순교하자”며 고문 버티다 동생 먼저 하늘로
남매 함께 체포돼 가혹한 고문 
배교 강요받으면서도 함께 버텨
동생 이호영 먼저 옥에서 병사
약 6개월 후 이 아가타는 참수

단내성지 5위 성인 순교비.

교구 단내성가정성지(전담 최재필 신부)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교우촌이며, 김대건 신부의 사목 활동지다. 특히 이곳에서는 이천(利川)이 고향인 성 이문우와 성 이호영, 성 이 아가타, 성 조증이, 성 남이관 등 5위의 순교성인을 기념한다. 대부분이 이천에서 태어났거나 체포돼 순교했고 또 가족 순교자들이다.

그중 성 이호영(베드로, 1803~1838)과 성 이 아가타(1784~1839) 남매는 형제지간으로 순교의 영예를 안은 사례다.

성녀 이 아가타.

성 이호영 베드로.

이천에서 태어난 이호영은 어려서 입교했으나 부친이 사망한 뒤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주했다. 많은 고생을 하면서도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던 그를 유방제 신부는 회장으로 임명했다. 늘 언어와 행위가 절조 있고 항상 가족들을 잘 가르치며 여러 신자와 외교인을 권면하니 주위에서 칭찬하는 이가 많았다고 한다.

1835년 정월(양력 2월)에 한강변 ‘무쇠막’에서 누이 이 아가타와 함께 체포된 그는 포도청과 형조에서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그가 옥중 서간에 기록한 문초 광경을 보면, 심문관은 주뢰로 정강이뼈가 옆으로 튀어나가게 한 후 “입으로 천주를 배반하겠다고 말하기 어려우면 큰 글자를 쓰게 할 것이니 네가 거기에 점을 찍거나 침을 뱉으면 배교한 증거로 삼아서 곧 풀어주겠다”고 했다.

이에 이호영은 “천만번이라도 싫습니다. 결코 그것을 승낙할 수 없습니다”고 했다. “조금이라도 아픈 소리를 내면 배교한 행위로 볼 것”이라는 말에 비명 한 마디 지르지 않고 참아 냈다.

결국 그는 형조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때 결안(結案)의 ‘사학죄인’(邪學罪人)이라는 문구(文句)에 대해 “천주교는 사학이 아니라 거룩하고 참된 도(道)라 수결(手決)할 수 없다”고 버텼고 관헌들이 강제로 수결시켰다.

그 후 형 집행이 연기돼 4년 동안 옥살이를 하는 고통 속에서도 누이 이 아가타에게 “한날한시에 순교하자”고 서로 위로했다.

옥에서도 대재(大齋)를 지키며 죄수 중 한 명을 회개시켜 영세 준비를 하도록 했던 그는 모진 형벌로 1838년 11월 24일 병사했다. 기해박해 순교자 중 첫 순교였다.

탁희성 화백의 작품 ‘성 이호영 베드로’.

이 아가타는 17세 때 결혼했으나 남편과 사별하고 친정에 돌아와 살다가 영세했다. 늘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는 자세를 보여 귀감이 됐던 그는 부친 사망으로 가세가 기울자, 삯바느질로 홀로된 어머니와 동생을 돌봤다. 늘 안색이 편안하고 아름다운 말과 착한 행실로 교리에 합당한 삶을 살았고 기도도 열심이었다.

동생과 체포된 뒤 이 아가타는 갖은 형벌로 배교를 강요받았다. 특히 여성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능욕을 당했다. 매를 때린 후 옷을 벗겨 높이 매달기도 했으나 그런 굴욕에도 이 아가타는 “오직 배주(背主)하지 못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피투성이가 되면서도 동생 이호영을 격려하며 고문을 견디어냈던 그는 동생과 함께 거듭된 배교 요청에도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진리를 버릴 수 없다”고 답했다. 이호영과 함께 형조로 이송된 후 팔다리가 성하지 않을 만큼 고문에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도 서로를 북돋우며 더욱더 굳센 신심을 보였다. 특히 이 아가타의 착한 표양에 옥졸까지도 그의 성교도리를 칭송했다.

같은 날 순교를 약속했으나, 이 아가타는 동생을 먼저 떠나보냈다. 이어 6개월 정도가 지난 후 1839년 5월 24일 8명의 신자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됐다.

남매는 1925년 7월 5일 비오 11세 교황에 의해 시복됐고, 1984년 5월 6일 한국 교회 창설 200주년을 맞아 방한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시성됐다.

탁희성 화백의 작품 ‘성녀 이 아가타’.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