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초대교회의 모습은 공소교회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인의 정서와 심성에 맞는 나름대로의 신앙 갖추기 노력을 피로써 증거한 교우촌 공동체는 공소교회의 모태(母胎)가 된다.”
안동교구장 권혁주 주교는 교구 사목국장 시절인 1993년 4월, 경향잡지에 기고한 ‘신앙과 생활 공동체의 모델–공소교회’라는 글에서 교우촌 공소 공동체가 한국교회의 토착화된, 이상적 신앙 공동체를 구현했다고 확신했다.
■ 교우촌 공소, 이상적 신앙 공동체의 구현
“신앙으로 모인 교우촌 신앙 공동체는 함께 믿고 함께 살아가는 부락 공동체, 마을 공동체의 틀을 갖추기까지 한다. 한국 천주교회의 초대 신앙 공동체의 모습은 삶의 모든 문제를 함께 고민하며 함께 풀어 나가는 ‘생활 공동체’였다.”
권 주교는 이어 전국 곳곳에 산재한 수많은 공소들 중에서 여전히 이러한 ‘신앙-생활 공동체’의 맥을 이어나가는 사례들을 찾아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26년 전인 1993년에 쓰인 글이지만 교우촌 공소의 아름다운 신앙 전통이 한국교회가 참으로 복음적인 공동체의 모습을 구현해 나가는 데 실마리가 될 것이라는 견해는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산하 순교영성연구소가 2016년 11월 19일 마련한 ‘병인박해 이후 평신도 신앙운동’ 심포지엄은 순교자 중심 교회사 연구에서 방향을 틀어 신앙 선조들의 투철한 삶에 눈길을 돌렸다.
이 자리에서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조광(이냐시오) 교수는 병인박해 이후 개항기까지, 교우촌을 이루고 ‘살아남았던 신자들’에 주목해 “한국교회사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에 대한 연구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강석진 신부(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는 ‘병인년 박해 이후 평신도의 삶과 신앙’에 대해 발표하면서, 1791년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교우촌이 박해의 칼날을 피한 신자들에게 중요한 삶의 못자리가 됐고, 이 공동체들이 종교의 자유를 얻으면서 공소와 본당으로 발전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고 설명했다.
■ 공소 공동체의 신앙과 삶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상임연구원 김혜경(세레나) 박사는 경기북부지역 공소 공동체 신자들에 대한 구술 연구를 바탕으로 한 ‘한국교회 소공동체의 뿌리로서 공소 공동체 연구’(2012년)를 통해 교우촌과 공소 공동체의 신앙과 삶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봤다.
김혜경 박사는 한국교회 공소 공동체의 모습이 ‘사도시대 초대교회로부터 시작된 교회 공동체의 원형에 가장 걸맞은 조건을 갖춘 교회’라고 규정했다. 즉, 교우촌은 “신앙생활과 생존을 위한 경제적 삶이 통합돼 하나의 운명 공동체 성격을 띠게 됐다”며 “전 신자가 나눔과 섬김을 몸소 실천함으로써 지역사회에 빛과 누룩의 역할을 하며 성사적으로 살아 온 공동체”라는 것이다.
교우촌 공소의 복음적 모습은 이미 19세기 선교사들의 편지를 통해서도 뚜렷하게 엿볼 수 있다. 전주 전동본당 초대 주임이었던 파리외방전교회 프랑수아 보두네 신부는 1889년 4월 22일 공소 방문 중 뮈텔 주교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보냈다.
“신입교우들의 협동심은 감탄스럽습니다. 그 중에서 뛰어난 미덕은 그들 서로가 사랑과 정성을 베푸는 일입니다. 현세의 재물이 궁핍하지만, 사람이나 신분의 차별 없이 조금 있는 재물을 가지고도 서로 나누며 살아갑니다. 공소를 돌아보노라면 마치 제가 초대교회에 와 있는 듯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그때의 신도들은 자기의 전 재산을 사도들에게 바치고 예수 그리스도의 청빈과 형제적인 애찬(愛餐)을 함께 나누는 것 외에는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이곳의 예비 신자들도 선배 형제들의 표양을 본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