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여성칼럼] 로마의 도둑과 LA흑인폭동/임영숙

임영숙ㆍ서울신문 문화부장
입력일 2017-06-05 15:30:42 수정일 2017-06-05 15:30:42 발행일 1992-05-31 제 1807호 9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서너해전 로마 여행길에서 였다. 흔히 로마관광의 출발점이라고 하는 베네치아 광장에서 꼴로세움으로 가는 포리임페리알리거리에서 집시에게 지갑을 소매치기 당했다. 로마의 도둑 이야기는 진부할 정도로 널리 알려진것이고 여행길에 오르기전 집시를 조심하라는 충고를 들었음에도 베네치아광장과 꼴로세움을 있는 거리의 악명은 미처 몰랐던 터였다. 폭군 네로 황제가 가톨릭신자들을 맹수우리에 던져 넣고 맹수와 인간의 치열한 싸움을 즐긴 꼴로 세움앞과 그 곳에 이르는 포리임페리 알리거리가 로마에서도 가장 도둑이 들끓는 곳이라는것은 소매치기를 당한 후에야 알았다.

도둑맞은 전말은 이러하다. 10대의 집시 4명이 신문지같은것을 말아들고 우리가족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그 종이를 남편앞에 들이대고 무언가 말을 하면서 그의 주의를 산란하게 한다음 호주머니를 뒤졌다. 남편은 즉시 집시중의 한명을 붙들고 지갑을 내놓으라고 소리쳤지만 나는 그를 도와 그 집시의 몸 수색을 할 수 없었다. 다른 집시들이 혹시 우리 아이들에게 해꼬지를 할까 겁나서 지갑을 찾는것 보다는 아이들을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다. 두 아이의 손을 잡고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사이 집시들은 남편의 손을 꼬집기도 하고 발로 다리를 차기도 하면서 도망치려고 애썼다. 마침 그때 한 동양인이 다가와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고 그의 도움으로 집시의 겨드랑이 아래 숨겨진 우리의 지갑을 찾을 수 있었다. 그 동양인은 놀랍게도 종교음악을 전공하는 한국인 유학생(이대성 요한)이어서 그의 친절한 안내로 우리는 까따콤바와 성바오로성당 등 가톨릭 유적지와 로마의 주요 관광병소를 편히 둘러 볼 수 있었다.

최근 미국의 로스엔젤레스에서 일어난 흑인폭동 소식을 듣고 엉뚱하게도 로마에서 겪은 이 작은 사건이 떠올랐다. 로마에서 낭패를 모면한 다음 나는 「미국에서 이런일을 겪었더라면 이처럼 평화로운 결말이 나오지 않았을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우리 가족은 미국에서 잠시 생활하다가 로마여행을 떠났었는데 뉴욕의 지하철에서 대낮에도 살인강도 사건이 일어난다는것과 강도가 금품을 요구할 경우 순순히 털리는것이 총부림 칼부림을 모면하는 길이라는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갑을 훔친후 현행범으로 잡혀가는것을 피하기 위해 자신을 붙잡은 사람의 손등을 꼬집는 로마의 순박한 (?) 도둑은 미국이 얼마나 병든 사회인가를 역설적으로 일깨워 주었는데 이번 LA폭동으로 인해 미국의 치부가 전세계에 알려지게 된것이다. LA폭동으로 인한 미국의 위신실추보다 우리의 관심을 끊것은 우리교민들의 피땀어린 재산이 약탈당하고 잿더미로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그 약탈에 일부 한국교민들도 가담하여 체포됐다는 소식은 미국사회가 안고있는 도덕의 불감증이 얼마나 전염성 높은가 하는 섬찟한 느낌을 안겨주었다.

로마여행 당시만해도 우리사회가 미국보다는 로마에 가깝다고 느꼈는데 어느사이 미국을 닮아가고 있는듯 하여 안타깝다. 성폭행이나 인신매매와 같은 범죄는 오히려 미국의 병든 수준을 능가하고 있는것 아닌지?

여성칼럼이 새롭게 바뀝니다. 16면 증면으로 인한 지면쇄신에 따라 필진을 각계 여성인사 4명으로 새롭게 구성, 다양한 소리를 담습니다.

이번호부터는 임영숙 (서울신문 문화부장) 윤일숙(햇빛출판사장) 김귀자(영남일보 문화부장) 강은교(부산동아대 국문과 교수)씨가 수고해주시겠습니다.

임영숙ㆍ서울신문 문화부장

기자사진

임영숙ㆍ서울신문 문화부장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