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님의 권능
자인으로 시작하는 ‘즈로아’라는 낱말은 이런 대결과 변혁의 상황에서 자주 등장한다. 즈로아는 본디 ‘팔’을 의미했다. ‘즈로아(팔)를 뻗다’는 ‘돕다’는 의미인데(시편 83,9), 우리말이나 영어에서도 ‘손을 내주다’(give a hand to)는 ‘돕다’는 의미이므로, 이런 표현에서도 역시 동서양이 보편적으로 잘 통한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팔을 뻗으시어 인간 역사에 개입하신 사건이 이집트 탈출 사건이다. 가난한 백성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역사에 개입하시어 당신의 크신 자비를 실천하신 이 사건에서 즈로아는 주님의 권능을 대표하는 말로 쓰였다.
일찍이 하느님께서는 “나는 주님이다. 나는 이집트의 강제 노동에서 너희를 빼내고, 그 종살이에서 너희를 구해 내겠다. 즈로아를(팔을) 뻗어 큰 심판을 내려서 너희를 구원하겠다”(탈출 6,6)고 당신의 의지를 밝히셨다. 이에 호응하듯, 갈대바다의 기적사건 직후에 모세는 “당신 즈로아(팔)의 위력을” 찬미했다(탈출 15,16). 신명기에서 모세는 이집트 탈출 사건에서 하느님의 즈로아(팔, 권능)가 온 세상에 떨쳤음을 잊지 말라고 후손들에게 거듭하여 신신당부한다(신명 4,34; 5,15; 7,19; 9,29; 11,2; 26,8).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즈로아가 미래에 펼칠 날을 꿈꾼다. 그는 하느님께서 민족들을 심판하실 것이기에 ‘당신의 즈로아(팔)에 우리가 희망을 걸리라’고 노래한다(이사 51,5). 결국 예언자는 예전처럼 하느님께서 “모든 민족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거룩한 즈로아를(팔을) 걷어”붙이실(이사 52,10) 그 날을 기다리며, “깨어나소서, 깨어나소서, 힘을 입으소서, 주님의 즈로아(팔)이시여”(이사 51,9)라고 기도한다.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이다. 이 세상의 가장 큰 권능께서 작은 아기의 모습으로 드러나시어 세상을 바꾸시는 신비를 묵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