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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외침’보다 ‘삶’이 될 수 있기를 / 이주연 편집부장

이주연 편집부장
입력일 2014-02-11 03:46:00 수정일 2014-02-11 03:46:00 발행일 2014-02-16 제 2882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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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福者)는 라틴어로 베아뚜스(Beatus) 혹은 베아따(Beata) 영어로는 더 블레스드(the Blessed) 라고 불린다. 사전적 의미에서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을 뵙는 지복직관을 누리는 영혼’을 묘사하는 데 통상적으로 쓰이지만 일반적으로는 교회가 생전의 덕행 또는 특별히 시복한 이들, 즉 하느님 나라에 들어갔다고 공식적으로 선포된 사람들에게 붙이는 경칭이다.

‘행복한’‘운이 좋은’‘더 없이 행복한’이란 뜻의 그리스어 ‘마카리오스’에서 유래됐다는 이 단어는 ‘진복 선언’(마태 5, 3-12)에서도 인용된 바 있다. 여기서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 조건을 언급하셨다.

학자들에 따를 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이들의 행복은 ‘하느님을 완전히 이해함으로써 그분을 본질적으로 보고 사랑하는 중에 누리는 초자연적이고 지복직관적인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복자로 선언된 이들은 한정된 지역에서 공경되지만, 신자들 기도의 중재자로 교회의 공식 기도문 안에 포함된다.

지난 8일 교황청으로부터 날라 온 124위 시복 결정이라는 낭보로 한국 교회는 1984년 103위 시성식 이후 30년 만에 124위 복자들의 탄생을 지켜보는 경사를 맞게 됐다. 지난 200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이들을 ‘하느님의 종’으로 선포한지 11년 만이다.

알려진 대로 이번 시복 결정이 의미 깊은 것은 첫 번째 큰 박해 였던 신유박해(1801년) 순교자들을 비롯 한국교회 주춧돌이라 할 만한 초창기 순교자들이 시복의 영광을 지니게 됐다는 것이다. 파리외방전교회에 의해 시작됐던 103위 시성과 달리 한국교회가 자체적으로 시복시성을 추진한 첫 대상자들이라는 면에서도 의미가 크다.

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 신자의 씨앗’라고 했던 라틴 교부 테르툴리아누스의 말처럼, 현재 한국교회가 누리고 있는 번성과 발전은 103위 성인, 또 곧 복자품에 오를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4위를 비롯한 무수히 많은 순교자들이 디딤돌이 됐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참수를 당했던 윤지충 바오로, 능지처참을 당한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처럼 시퍼런 박해의 칼날 속에서도 한결같은 목소리로 주님을 증거 한 믿음과 신앙 때문일 것이다.

이들을 포함한 순교 선조들은 배교의 독촉 앞에 초개같이 목숨을 버렸던 굳건한 믿음과 함께 예수님이 가르친 복음의 삶을 직접 몸으로 살아냈다. 양반과 상민 계급을 초월했고 이웃을 돕는데 헌신하며 나눔을 실천했다. 엄동설한 차가운 날씨에 얼려 죽는 형에 처했던 원시장 베드로는 복음대로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면서 마을 사람들을 감화시키고 복음을 받아들이게 했다. 그러한 결과는 신앙이 ‘말’, ‘외침’으로 그치지 않고 곧 ‘삶’이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놀라운 양적 성장의 모습을 구가하고 있지만 여러 위기 상황 속에서 내적 결핍을 겪고 있다는 진단이다. ‘순교’를 소리 높여 이야기하면서도 순교 정신과 삶은 계승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받고 있다. 시복시성을 위한 기도문에서처럼 선조들을 본받는 다는 것은 그들처럼 신앙을 굳건히 증거하고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124위 시복결정 소식에 기뻐함에 앞서 그 후손들인 우리에게 남는 숙제는, 결국 ‘ 혼탁한 이 세상 안에서 나는 내 하느님을 어떻게 고백할 것인가, 내가 믿는 하느님을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이주연 편집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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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연 편집부장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