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사람들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 난다고 두려워하면서 절망하고 좌절합니다. 그러나 가톨릭교회는 죽음이 새롭고 영원한 삶으로 가는 한 과정이라고 믿습니다. 이런 믿음은 하느님을 받아들일 때만 가능합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허무로 돌리는 죽음마저도 물리칠 수 있고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분명하게 확인되었다고 가톨릭교회는 믿고 있습니다. 이런 신앙과 희망은 죽은 이들을 위한 미사 기도문에 잘 드러납니다. 그래서 죽음을 대비하는 문화적 장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유교전통의 조상들은 죽음을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로부터 자기가 죽은 뒤에 들어갈 묏자리를 미리 마련해놓는 일은 당연한 것처럼 여겨 이순(耳順)을 넘기면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보고 자신의 사후 거소를 마련합니다. 또한 자기가 입고 갈 옷(수의)과 관을 미리 마련해 두는 것도 죽음을 대비하는 장치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요즘도 주변에 살림살이가 좀 여유가 있는 이들은 묘지를 미리 마련해두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이들은 시간이 날 때 마다 자기가 사후 거처할 곳을 찾아가 손질을 하고 자식들에게도 자기가 죽으면 이곳에 묻어 달라고 당부를 하기도 합니다.
이는 죽은 자의 묏자리인 음택(陰宅)과 산사람의 거처인 양택(陽宅)과 동일한 비중으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한 문화적 장치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이 임박하면 분노하고 죽음을 거부하며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지만 마지막에는 화해하고 순명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은 마지막엔 움켜쥐고 있던 두 손이 스르르 펴지면서 평소에 잘못한 것들을 낱낱이 밝혀내고 후회(後悔)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야하는 ‘공수래공수거’인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요즘 직위 고하를 막론하고 목숨을 쉽게 버리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할지 가슴에 손을 짚고 깊이 생각해야 할 일 입니다.
또한 가톨릭교회에서는 목숨을 자해하는 것을 역천(逆天), 즉 하느님의 계명을 거스르는 행위라 하여 대단히 나쁘게 평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죽하면 자기 목숨을 버리겠느냐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부르실 때 까지는 잘 보전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 각자의 목숨은 어머니의 몸을 빌려 하느님으로 부터 목숨을 부여 받아 이를 지키는 청지기에 불과 한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죽음이든 간에 세상을 하직한다는 것은 관계 속에 슬픔은 헤아려 줘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효성이 지극한 자식은 부모가 세상을 떠나시게 되면 모든 것을 접어두고 부모 산소 옆에 움막을 지어놓고 삼년동안 ‘시묘 살이’를 하는 관습은 요즘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는 각자의 몫 입니다. 모든 가족들과 멀리하고 삼년동안 무엇을 하였겠는가. 삶이란 무엇이고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지냈을 것입니다.
살아생전 부모에게 다하지 못한 효의 표현이라고 하지만 다 부질없는 헛되고 헛된 일일 뿐입니다. 사람을 위시해서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세상에 왔다가 한번은 가야 하는 길입니다. 그것은 갈 때는 순서 없이 그 높으신 분께서 부르시는 순서대로 갈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