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성당이며 가톨릭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는 서울 명동성당.
금년 5월 29일로 성당 축성봉헌 97주년을 맞는 명동성당의 대지는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 주교가 1883년부터 89년까지 38차례에 걸쳐 인근의 땅들을 매입하면서 조성됐음이 밝혀졌다.
또한 당시 조선정부의 토지문서 압류와 일본인들의 대지소송 등 두차례에 걸친 대지 분쟁끝에 현재의 성당터를 완전히 확보할 수 있었다.
이같은 사실은 한국교회사연구소(소장=최석우 신부)가 명동천주교회 2백년사 자료집 제6집「명동성당 토지조성사」를 편찬 작업한 결과 드러난 것이다.
이달말경 출간될 예정인 토지조성사는「대지매입과 제1차 분쟁」「대성당 건축과 낙성식」「제2차 대지분쟁」등 3편으로 나뉘어 그간 알려지지 않은 명동성당 대지의 매입과정, 대성당 건립과정, 이와 관련된 각종 분쟁사건 등을 총망라하고 있다.
교회사 관계자들과 명동본당측은 이 자료가 한국교회사 안에 차지하고 있는 명동대성당의 초기 역사, 한불조약(1886년) 이후 한국의 중심지인 서울에서 가톨릭이 정착해 가는 과정을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명동성당 토지조성사에 의해 새롭게 밝혀진 구체적 사실들은 첫째 대지 매입과정이다. 제7대 조선교구장으로 있던 블랑 주교가 1883년 6월 21일 현 가톨릭회관과 명동대성당사이「종현학당」부지를 매입한후 1889년 6월 13일까지 총 38차례에 걸쳐 주변의 땅을 매입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당을 짓기 위한 블랑 주교의 노력을 엿보게 하는점이다.
또한 1888년과 1890년에 걸쳐 조선정부의 명동성당 토지 문서 압류와 그 환수를 위한 교회의 노력이 드러나 있다. 분쟁 2년만에 환수된 성당 토지문서는 박해시대 후 한국사회내에 남아있던 천주교에 대한 편견을 물리치고 박해를 완전히 종식시킨 하나의 표지로 상징되고 있다.
이외에 진고개(세종호텔 인근)쪽으로 샬트르 성바오로수녀원을 무단 침입하거나 명동대성당 부지를 침탈함으로써 야기되던 진고개 사건, 성당 정초식과 건립과정, 축성식과 관련된 사실들이 처음으로 밝혀지고 있다.
일본인들과 대지 소송사건으로 야기된 제2차 대지분쟁도 토지조성사를 통해 새롭게 알려진 사실이다. 여기서는 3차에 걸친 재판에서 교회쪽이 불리하게 재판을 받고 패소하는 등 조선 천주교회를 무시한 당시의 사회상이 소개되고 있다. 이와함께 뮈뗄 주교가 일본의 프랑스대사에게 이 사건의 중재를 요청하는 등 토지환수를 위해 노력을 기울이는 모습들이 소상하게 소개되고 있다. 제2차 분쟁이후 명동 대지 내용을 소개하는「지적도」(지역평면도)도 공개돼 관심을 끈다.
이에대해 명동본당주임 장덕필 신부는 『명동성당 토지조성사는 성당구역의 시비를 가리기 위한것이 아니라 명동의 초기역사를 정리하고 지역 종합개발을 위한 실측 작업』이라며『명동토지 조성사에 의해 밝혀진 내용들은 성당을 짓기위해 노력한 교회 선배들의 고뇌와 어려움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장신부는 덧붙여 『이러한 선배들의 모습은 앞으로 현재의 교우들이 더욱 명동성당을 가꾸고 현대적 복음선교의 장으로 보호해 가야 함을 주지시켜 준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