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복음의 꽃이 피기까지 화보

입력일 2011-04-19 13:41:28 수정일 2025-05-27 16:34:59 발행일 1980-01-01 제 1186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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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烈의 피땀위에 면면이 이어온2百년 
殉敎者들의 큰얼살려 福音化 역군돼야

격동과 혼란의 70년대를 보내고 한국교회는 이제포교 2백주년을 눈앞에든 대망의 80년대 문턱에 들어섰다. 선각자들의 예지와 성령의 이끄심 아래 한국 땅에 복음의 싹이 뿌리를 내린지 2백년을 맞는 대망의 80년대 새해 새아침을 맞아 앵자봉 중턱 천진암에서 싹트기 시작한 복음의 씨앗이 그동안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와 땀을 밑거름으로 하여 오늘의 풍성한 열매를 맺기까지2백년의발자취를 화보로 엮어본다.

옷깃을 파고드는 계곡 드는 계곡의 겨울바람이 차갑다.

앵자봉의 우람한 모습은 변함이 없건만 진리를 찾아 열띤 토론을 벌였던 선각 (先覺) 들의 힘찬 목소리는 찾을 길 없다 . 선열들이 목욕재계하고 몸과 마음을 씻었다는 계곡의 물소리만이 찬 공기를 가르며 2백년의 침묵을 깨고 있다

앵자봉중턱 높고 낮은 능선이 병풍처럼 에워싼 3천여평의분지 (盆地)?

이곳이 바로 한국 천주교의 요람지 천진암(天眞菴) 터이다.

이곳은 거금 (鉅今) 2백년1777년경 겨울 우리의 장한 선조들 이자리를 같이하여 성교회의 오묘한 진리를 탐구하며 학문과 신덕을 함께 닦은 곳이다. 또한 이곳은 한국천주교회 창립에 주동역할을 했던 요한 이벽이 이승훈(베드로)으로 하여금 북경에서 영세、입교토록함으로써 우리겨레 스스로의 힘으로 그리스도 진리의 등불을 이땅에 밝힌、세계 교회사에 그 유례를 찾을길 없는 계기를 이룬 성징기도 한다.

崇儒排拂의 풍조가 지배하던 李朝시대에 이벽 선생을 비롯 권철신ㆍ이승훈ㆍ정약전ㆍ 정약용 등 당대의 거우(巨儒)들이 산사(山寺)에서 講學會를 가진것도 아이러니칼한 일이지만、 더구나 이들이 여기서 기독교진리를 탐구하고 이에 심취했던 사실은 더욱 신기한 일이라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항상 인간의 지례를 초월、역사 (役事) 하시는 하느님의 구원의 신비앞에 새삼 놀라움을 금할길없다.

한국복음화의 산실인 이곳은 그 후 오랜 세월동안 우리의 기억속에 사라진채 묻혀왔다. 그후 이곳은 신앙의 뿌리를 찾아 헌신적으로 애써온 인사들에 의해 1960년경 문헌상으로 장소가 발견됐고、이어 1962년 마을 노인들의 증언을 토대로 확인 답사끝에 비로소 세상에 드러나게 됐던것. 그후 수원교구가 은인들의 도움을 얻어 천진암터와 인근 대지 1만2천5백여평을 매입、본격적인 성역화작업에 나섰다. 특히 금년 6월 경기도 포천군 내촌면 화현3리에 있던 천진암 講學會의 주역 인물인 이벽 선생의 묘소를 이곳에 이장한것을 계기로 성역화작업은 크게 활기를 띠기시작했다

그러나 발길에 채이는 돌맹이 하나에서부터、깨어진 한조각 기와장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것하나 조상의 얼이 담기지 않은것이 없는 이곳은 거대한 목제(木製) 십자가와 이벽선생의 묘소만이 쓸쓸히 옛터를 지키고 있을뿐、찾는이의 발길이 거의없는 가운데 아직도 황량하기 그지없다.

한편 경기도 인천시 만수2동 뒷산기슭에는 한국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린 최초의 신자 이승훈(베드로)의 묘소가 자리잡고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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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의 묘 인천시 만수2동 뒷산 기슭에 있는 한국 최초의 신자 이승훈의 묘

성균관에서 수학중 중국에 들어가 그라몽 신부로부터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세례를 받고 1784년에 귀국、서울명동에 있던 김범우(도마)의 집을 빌어 교회를 세운 그는 1801년 박해때 서소문밖 네거리에서 45세의 나이로 참수、순교함으로써 그의 세례명 그대로 한국교회의 초석이 됐다.

잔솔밭속에 자리잡은 10평정도의 묘역은 잔디가 곱게 손질돼 있었고 6척정도의 대리석 묘비에는 「韓國天主敎先覺者 李永載之墓」 란 碑銘이 유난히도 선명히 눈길을끄는 가운데 순례자가 바친 꽃다발이 겨울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비교적 잘손질 된 모역에 비해 큰길에서 묘소에 이르는 5백여m의 길은車道도 닦여지지 않았고 특히산밑에서 묘소까지 50여m의 산길은 오솔길 그대로 방치돼있다.

70년대에 들어 각 교구가 다투어 순교지 성역화작업에 열을 올리고 있는 이때 정작 한국교회의 요람지와、초석이 묻힌 이곳이 이처럼 세인의 무관심속에 방치된 현실은 모두가 깊이 생각해봐야할 문제인 것 같다.

순교자들의 피와땀을 바탕으로 한국교회는190여개 성상을 면면이 이어왔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오늘이 있기까지에는 수많은 순교자들이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장한최후를 마쳐야했던、 인간적인 고통과 비극의 시련을 겪어야했다.

순교자들의 피땀위에 성장해 온 한국교회는 그동안 온갖 어려움속에서도 이땅에 그리스도의 사랑과 정의를 심고 증거해왔다. 특히 각 분야에 걸쳐 선진 서구 문물을 도입、 한국의 근대화작업에지대한 공헌을 하기도 했다. 일지기 선열들에 의해 이땅의 복음화 전초기지로 출범했던 명동대성당은 이제 수도교구의 주교좌성당으로서 뿐만 아니라 한국 가톨릭의 상징적 존재로서 그 웅자를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포교 2백주년을 눈앞에 둔 한국교회 교세는 아직도 1백20만에 머물고 있다. 이는 전 국민의3ㆍ2%에 불과한 미미한 숫자이다. 또한 공의회정신을 바탕으로 한 사회의 복음화작업역시 70년대에 들어 겨우 첫 시도가 이루어졌으나 복합적인 힘든 여건으로 아직도 바람직한 성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우리가 하느님 말씀을 전파하는 일에 얼마나 소극적이었고 순교선열들의 큰뜻을 망각해왔는가를 말해주고 있다. 이제 포교2백주년을 맞게되는 대망의 80년대를 맞아 그동안 수많은 순교선열들이 피흘려 가꾸고 거름을 주어 마침내 풍성한 열매를 거두는일?

이것이야말로 80년대를 맞는 우리보두에게 맡겨진 임무라 하겠다.

 

글 · 사진 유재두 편집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