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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마당] 숙모님의 사랑

고재덕 안드레아(서울 세종로본당, 시인·수필가)
입력일 2022-10-12 수정일 2022-10-12 발행일 2022-10-16 제 3314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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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오고 억센 호박잎이 갈색으로 시들어가니 인생도 그런가보다. 국난의 회오리 속에 아버지께서 전사하시어 편모슬하에서 중학교를 겨우 마친 나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숙모님 밑에서 자랐다. 그 은혜는 깊고 보답은 얕아 인간의 도리를 다하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크다.

숙부님은 공무원이셨는데 박봉의 어려운 살림인데도 콩 한 조각이라도 나눠 먹이며 조카 삼 남매를 친자식처럼 돌보아주셨다. 육군 중위로 전역 후 취업 준비를 위해 학원에 등록했다. 육군 중위의 쥐꼬리만한 전역비를 털어서 겨우 3개월 치 학원비를 냈으나, 그 다음부터는 학원비가 밀렸다. 어느 날 아침 식사 중 숙부님이 친구아버지께서 별세하셨으니 조문을 다녀오라며 조의금을 주셨다. 이 돈으로 조의금을 낼까 학원비를 낼까 마음이 요동쳤다. 그때 학원에서 오늘 중으로 재등록을 하라는 독촉 전화가 왔다. 조급한 마음으로 그만 조의금을 학원비로 전용하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 식사 중 숙부님께서 조의금 잘 전달했느냐고 자세히 물어보셨다. 몇 시에 갔느냐 누굴 만났느냐 등 점검하시니 수저가 입까지 가는데 십리 길처럼 멀리 느껴졌다. 부득이 조의금을 학원비로 비겁하게 대납했으니 마음이 떨려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고, 자꾸 자꾸 왜소해졌다. 숙모님께서 큰 소리로 숙부님의 말을 막아 위기를 모면했다. “다 큰 아이인데 심부름을 안 갔겠어요? 밥도 못 먹게 자꾸 물어요.” 그날 오후 학원에서 집에 오니 숙모님께선 눈치 채시고 별도로 조의금을 주셨다. 즉시 상가(喪家)에 가서 조의금을 전달했다.

“미움은 싸움을 일으키지만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어준다.”(잠언 10,12) 숙모님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성경 구절이다. 숙모님은 학력이 부족한 시골 출신이었지만, 당시 향교의 유학자이신 조부님 밑에서 예의범절 교육을 훌륭하게 받으셨기에 생각이 깊고 덕인이셨으며, 더욱이 나를 천주교에 입문시켜 주셔서 고마웠다. 숙모님의 따뜻한 사랑이 목련꽃처럼 향기로우니 학벌인들 무슨 의미가 있으랴! 백 마디 훈계보다 한 번의 숙모님의 따뜻한 사랑에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마음속 깊이 각인 되어 일생동안 잊을 수 없다.

그러나 칠십을 넘었는데도 숙모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니 미안한 마음 그지없다. 요즘 병원을 자주 드나드시니 숙모님 건강이 걱정된다. 정성껏 모시겠다고 다짐을 했지만 기껏 명절 때와 생신에 찾아뵙는 조그만한 치레는 구우일모(九牛一毛)에 불과했으니 어찌 숙모님의 큰 사랑에 보답하랴! 어우렁더우렁하다가 세월만 덧없이 흘러가서 조카로서 도리를 다하지 못해서 숙모님께 항상 죄송할 뿐이다.

숙부님이 갑자기 금년 삼월 하늘나라에 가셨으니 행여나 숙모님이 어찌될까 마음이 떨린다. 숙모님마저 떠나면 이 조카는 고립감에 흔들릴 것이다. 삼가 숙모님께서 만수무강하시기를 기도드린다.

고재덕 안드레아(서울 세종로본당, 시인·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