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한담

[일요한담] ‘수님’의 약속 / 임선혜

임선혜 아녜스(소프라노)
입력일 2022-07-26 수정일 2022-07-26 발행일 2022-07-31 제 3305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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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어떻게 성당에 다니게 되셨나요? 저처럼 부모님이 성당에서 만나셨거나, 이미 신자이셨던 경우에는 선택권이 없이 유아세례를 받게 되지요. 하지만 성인이 되어 스스로 성당에 발을 내딛은 경우에는 저마다의 소중한 이유와 특별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희 친할머니처럼요. 오늘은, 아들 며느리가 성당에 다녀도 무슨 일이 생기면 무당을 불러 굿을 하셨다는 이 완고한 어른이 ‘우리 집 천사’로 살다 가신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해볼까 합니다.

시골에 사시던 할머니가 저희 가족과 함께 지내기로 하신 건 제가 대학 3학년 때였습니다. 기력이 예전 같지 않으셔서인지 편리한 아파트와 도시 생활을 다행히 마음에 들어 하셨어요. 노인정 언니들과도 재미나게 잘 지내시고 곱게 쪽 지셨던 머리도 곧 짧게 자르시니 반곱슬이라 얼마나 예쁘시던지 집에 자주 드나들던 동네 교우분들이 세련미 넘친다고 난리였지요. 그 무렵부터 ‘문 여사’가 되셨는데 이렇게 불러 드리는 걸 싫어하지 않으셨어요. ‘이제 여자도 세상에 나가 뜻을 펼칠 수 있는 세상이로구나’ 하시며 여동생과 저의 공부도 자랑스레 여기며 응원해 주셨고요.

그러던 어느 날, 대학 졸업반이던 저는 국제 콩쿠르에 참가하러 일본에 가게 되었어요. 한국에서 대상을 받아 예선을 면제받고 가는 길이었는데 처음 가는 일본에, 첫 국제 콩쿠르라 걱정이 되었는지 제가 그랬답니다. “할머니, 기도해 주세요!”

주무시다가 목이 말라 잠을 깬 할머니는 부엌에 나오셨다가 문득 손녀가 한 말이 생각나셨대요. 엉겁결에 알았다고는 했는데, 도무지 기도는 어떻게 하는 건지 알 길이 없으시더래요. 그래서 아들, 며느리가 하듯 거실 한가운데 놓인 예수성심상 앞에 가만히 앉아 두 손을 모으고, “우리 손녀 출세하게 해 주세요!” 했더니 글쎄, (할머니 표현으로) ‘수님’이 고개를 끄덕인 겁니다. 잠이 덜 깼나, 헛것이 보이나 싶어 한 번 더 말해 봤는데 또 끄덕끄덕! 놀라서 혼이 달아난 할머니는 한잠도 못 주무시고 다음 날 아침 엄마와 혼자 남았을 때서야 그 이야기를 털어놓으셨대요. 노망이 난 줄 알면 어쩌나 싶어 조심스럽게. 그런데 엄마는 태연하게, “그럼, 우리 문 여사 덕에 선혜가 뭐라도 상 하나 타오겠네요!”

저는 여자부 2등상과 청중상 그리고 역대 최연소 입상자 타이틀까지 얻어 기쁘게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뛰어나오신 할머니께서 저를 꼭 안고 엉엉 우시는 겁니다. 아무 것도 모르던 저는 당황했지요. 물론 자초지종을 듣고는 더 놀랐고요. 그동안 할머니는 혹시나 당신께서 기도를 잘못해서 제가 상을 못 타 올까봐 노심초사 하셨대요. 이미 전화로 수상 소식을 전해 안심은 하셨겠지만 막상 저를 보시곤 그만 아이처럼 울음이 터지신 거였습니다.

그 후로 할머니의 세례 준비는 일사천리로 자연스럽게 진행되었습니다. 세레나 구역장님이 교리를 맡아 주셨고, 결국 ‘수님’도 예수님으로 정정되었지요. 그리고 그해 크리스마스, 대모님의 세례명을 따라 할머니도 ‘모니카’라는 새로운 이름 세 글자를 얻으셨어요. 온 가족, 온 동네의 축하를 받으며 꽃다발을 안고 환하게 웃으시던 할머니! 사진으로 남아 있는 가장 아름다운 할머니의 리즈 시절입니다. 이후 돌아가실 때까지 정말 예쁘게 사셨어요. 할머니만 다녀가시면 울던 엄마가 ‘우리 집 천사’라고 자랑하고 다닐 정도였으니까요.

그리고 ‘수님’도 그 천사와의 약속을 잘 지켜 주신 듯합니다. ^^

임선혜 아녜스(소프라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