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한담

[일요한담] 아녜스의 노래 / 임선혜

임선혜 아녜스 소프라노
입력일 2022-07-12 수정일 2022-07-12 발행일 2022-07-17 제 3303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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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5학년 때 본당 성탄제였을 겁니다. 우리 학년은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로 연극을 했는데, 똑똑하고 세례명도 마리아였던 은환이가 마리아 역을, 누가 봐도 참 예뻤던 세희가 대천사 가브리엘 역을, 그리고 저는 마리아의 사촌 언니 ‘엘리사벳’ 역을 맡게 되었습니다. 집에 온 마리아를 반가이 맞으며 읊는 제 대사는 성모송 앞부분에 나오는 내용으로 시작했지요.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 주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문안의 말씀이 제 귀를 울렸을 때에 내 태중의 아기도 기뻐하며 뛰놀았습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

분명 언니인데 왜 존댓말을 쓰나 싶었지만 동생이라도 존경과 감격스러움에 가득 차 자기도 모르게 정중하게 대하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훗날 요한 세례자라 불리는 배 속의 아들이 마리아의 목소리를 듣고 힘차게 뛰니, 사촌 동생 마리아가 얼마나 귀한 아기를 품었는지 새삼 느꼈을 테니까요. 몇 안 되는 이 문장을 저는 정성들여 외웠습니다. 딱 한 번 등장하는 엘리사벳의 유일한 대사였거든요. 그리고 드디어 은환이 마리아의 긴 대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렙니다. 주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해주신 덕분입니다….”

앞으로 두 배가 넘는 대사가 이어졌지만 얼마나 또박또박 잘 외우던지요.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경청하던 저는, 그 대사 하나하나가 너무 멋져서 언젠가부터 속으로 따라 외우게 되었습니다. 특히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다’는 말은 그 어린 나이에도 정의롭고 통쾌한 힘이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세월이 흘렀고, 작은 엘리사벳 역도 수줍던 시골 출신 소녀는 최고의 대학에 들어가더니 IMF 시대에 독일 정부 장학생으로 유학을 떠났고 어느덧 국제적인 소프라노가 되었습니다. 가당치도 않지만, ‘능하신 분이 나의 낮음을 돌보시어 내게 큰일을 하셨다’는 부분이 마치 제 이야기 같더군요. 이 구절을 마주할 때면 늘 마음이 벅차올랐습니다. 마리아를 만났던 엘리사벳처럼요!

저의 직업과 외국 생활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화려하지만은 않았습니다. 무대 위에서처럼 늘 환호를 받는 것도 아니었지요. 때때로는 ‘하느님, 제게 왜 이 길을 가게 하셨어요?’하며 응석 어린 원망이 튀어나왔습니다. 하지만 이 구절을 대할 때면 다시금 하느님께서 제게 하신 일이 여전히 기적 같고 다시금 감격스러워졌어요.

그리고 마치 오래 전부터 준비된 선물인 듯 바흐의 ‘Magnificat’이라는 작품을 만났습니다. Magnificat(찬양하다) anima(영혼) mea(나의) Dominum(주님을) : 우리가 ‘성모찬송’ 또는 ‘마리아의 노래’라 부르는 이 노래가 라틴어로는 ‘찬미하다’라는 뜻의 Magnificat으로 시작하여 이를 마니피캇이라 부른답니다. 각 구절들은 합창이나 중창, 독창곡으로 나뉘어 불립니다. 그런데 작품 속 소프라노 독창곡이 바로 ‘당신 여종의 낮음을 굽어보셨네, 이제 과연 만세가 나를 복되다 하리니’가 아닌가요!

마침내 정말 벅찬 ‘아녜스의 노래’가 되었습니다.

(※옛 기억대로 개정 전 공동 번역 성경의 루카 복음을 사용했음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임선혜 아녜스 소프라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