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요. 태어나자마자 두 세상을 동시에 살았어요. 초등학교가 있던 세상에서는 속명(세속명)으로 불리고 일제 치하에서 일본어를 쓰며 지내야 했고, 교우촌으로 들어오면 안드레아로 그야말로 자유로웠죠. 교우촌 신자들은 숯과 옹기를 구워 팔거나 화전을 일궈 생활했기 때문에 가난하게 살았지만, 한 번도 가난이 힘들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습니다. 신앙생활만으로도 기쁨이 넘쳤거든요.
“우리 아기가 벌써 ‘성부와~’해요!”
교우촌에선 말 배우면서 동시에 성호경을 배우는 게 자랑거리인 분위기입니다. 아기들이 ‘엄마’, ‘아빠’하며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 부모들은 아기 손을 끌어다가 ‘성부와 성자와 성신(성령)의 이름으로 아멘’하고 자연스럽게 반복해주거든요. 그러니까 말 배우면서 기도 배우고 기도 배우면서 말을 하니, 흔히들 ‘태어나면서부터 기도했어’라는 표현이 사실이기도 했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사주구령’(事主救靈·하느님을 섬기며 영혼을 구원하는 일), ‘위주치명’(爲主致命·하느님을 위하여 순교함)이 매일 삶의 슬로건이기도 했고요.
일 년에 두 번 판공성사를 위해 신부님께서 교우촌에 오시는 때는 정말 축제예요. 그런데 동시에 긴장되는 비상 기간이기도 합니다. 고해성사 하기 전에 찰고를 받아야 하거든요. 그런데 그게 일종의 연좌제예요. 온 가족이 함께 신부님 앞에 나가서 찰고를 받는데, 예를 들어 아이가 대답을 못 하면 부모는 ‘자녀를 어떻게 가르쳤어’하고 호통을 맞곤 하죠.
저는 기억도 안 나는데요, 누님 말씀으론 찰고 때 제가 대답을 아주 잘했다고 해요. 그래서 아직 첫영성체 반에 들어갈 나이가 되지 않았는데도 신부님께서 ‘첫영성체 해도 되겠다’라고 하셔서, 제가 월반을 했어요.
제가 참 곤혹스러운 것은요, ‘왜 신부가 됐느냐’, ‘언제부터 신부가 되고 싶었냐’라는 질문을 받을 때랍니다. 제 성소는 그냥 이뤄진 것이지, 제가 뭐 대단한 포부를 갖고 희망했던 적은 없었거든요. 더 솔직히는 ‘언감생심’ 사제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어린 시절엔 일 년에 몇 번 겨우 만나 뵙는 신부님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분인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제가 국민(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가르멜 수녀회에 입회하신 큰 누님 면회를 갔습니다. 그때 수녀회 외부 담당 수녀님께서 ‘안드레아, 넌 커서 뭐가 되고 싶니?’라고 물으시는 거예요. 제 미래에 대한 질문은 그때 처음 받아본 것 같아요. 대답을 바로 못 했는데 그 다음날 또 물으시는 겁니다. 그러면서 ‘신부 되지 그래’ 하셔서, 싫다고도 하겠다고도 대답을 못 했는데, 수녀님께서 가족들이 함께 있는 면회실에 오셔서 대뜸 ‘안드레아는 이 다음에 신부 된데요’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때부터 전 신부 지망생이 되어 버렸죠. 이후론 아버님께서도 혼내실 때마다 ‘이 녀석아, 신부 될 놈이 그러면 되냐’라고 하셔서, 저도 덩달아 ‘아 나는 신부가 되나 보다’라고 생각한 거 같아요. 제가 지원한 건 아니지만 소신학교에 입학하게 됐고, 일단 입학을 했으면 쫓겨나면 부끄럽잖아요. 그래서 뭐 쫓겨나지 않을 정도론 공부를 열심히 했던 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