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파티마의 성모 프란치스코 수도회(상)

박민규 기자
입력일 2022-05-04 수정일 2022-05-04 발행일 2022-05-08 제 3293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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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마음으로 가난한 이들 돌봐

해방직후 거리를 부랑하던 소년들과 함께하고 있는 파티마의 성모 프란치스코 수도회 설립자 이우철 신부.

파티마의 성모 프란치스코 수도회(총원장 장정숙 모데스타 수녀)는 고(故) 이우철 신부(시몬·1915~1984)가 설립한 방인 수녀회다. 이우철 신부는 수녀회를 창설하기 오래전부터 예수 성심께 봉헌된 불우한 소년들의 아버지였다.

이 신부는 1944년 서울 약현본당(현 중림동본당) 보좌신부 겸 가명초등학교 교장으로 부임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해방 전후로 극심한 사회적 혼란을 겪고 있었고 많은 소년들이 거리를 부랑하고 있었다.

1946년 이 신부는 좁은 사제관에 5명의 소년들을 위해 사랑의 안식처를 마련하고 이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이 신부가 소년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사제들과 주변인들은 버림받은 어린 소년들을 그에게 의탁했고, 소년들의 수가 늘어났다.

이 신부는 이 모든 일을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사도직으로 받아들이면서 1947년 서울 잠실리(현 잠원동)에 불우한 소년들을 위한 보육원인 성심원을 설립했다.

하지만 6·25전쟁이 터지면서 영아들은 성심원에, 큰 아동들은 이 신부의 본가로 피난을 떠나야 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이 신부는 헌신적인 사랑으로 매년 200명이 넘는 소년들을 국가의 도움 없이 양육하고 보호했다. 그러나 이 신부의 관심과 사랑만으로는 부족했다. 이 신부는 아이들을 위해 희생 봉사할 어머니들이 필요함을 절감했고, 또한 간절히 바랐다.

때마침 성심원 창립 당시부터 한마음으로 뜻을 같이했던 김의경(막달레나) 동정녀와 몇몇 자매들의 청원으로 1969년 ‘어머니회’라는 신심 단체가 발족했다. 김의경은 훗날 수녀회 초대 원장이 됐다. 수녀회의 모체인 ‘어머니회’는 자모적인 사랑과 헌신적인 희생으로 아이들을 보살폈다. 이 신부는 이들의 믿음과 삶을 보고 ‘어머니회’를 수녀회로 만들려고 했지만 교구가 해체 명령을 내렸다. 그럼에도 이 신부는 이 모든 상황을 하느님 섭리에 맡겼고, 어머니회는 마침내 1978년 프란치스코회 제3회 수녀회로 재발족했다. 곧이어 수녀회는 지금의 이름으로 1980년 정식으로 수원교구 인가를 받았다.

그러다 성심원은 아파트 개발 사업으로 잠원동을 떠나 수원교구 내 용인시 동천동에 새로운 터를 잡았다. 이 신부는 1984년 2월 성심원 건축 첫 삽을 뜨고 다음 날 지병이 악화돼 선종했다. 수녀회는 성심원의 모든 운영권을 이어받으며 모성적 사랑으로 아이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 사도직을 펼쳐갔다.

이 신부가 지녔던 성모님께 대한 지극한 사랑은 그의 온 생애에 큰 힘이 됐다. 그는 늘 수녀회 회원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 “불우한 소년들의 어머니가 되도록 하십시오. 어머니의 마음으로 가난한 이들을 돌보십시오.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미처 사람들이 못하는 부족함을 수도자가 해야 합니다.”

박민규 기자 pmink@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