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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1. 윤공희 대주교(6)

정리 남재성 기자
입력일 2022-04-26 수정일 2022-04-26 발행일 2022-05-01 제 3292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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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세계 곳곳 다니며 한국교회 위한 도움 호소
신설 수원교구장으로 갑작스럽게 임명
이틀 만에 여권 발급 받아 공의회 참석
사제 수 부족해 신학생 양성에 주력
유학 때 맺은 인연으로 모금에 도움 받아

1965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 참석을 위해 출국하는 한국주교단.(왼쪽부터 지학순 주교, 윤공희 주교, 최재선 주교, 노기남 대주교, 서정길 대주교, 한공렬 주교, 황민성 주교).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주교 임명과 서품식

‘바오로 6세 교황님이 윤공희 신부를 로마로 불렀다.’

주한교황대사관에서 외무부에 보낸 외교공문은 간단했다. 딱 한 줄이었다. 부리나케 출국하기 위해 외무부에 여권을 신청하러 갔는데, 이미 공문이 와 있어서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때는 1963년 10월이었다. 당시 나는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부총무로 일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교황대사관에서 차량이 왔다. 그 차로 대사관에 갔더니, 교황대사가 내가 신설 수원교구의 교구장 주교로 임명됐다는 소식을 전했다. 어안이 벙벙했다. 그날은 10월 9일 한글날이었는데, 주교서품식은 10월 20일 전교주일에 맞춰 로마에서 거행된다고 했다. 열흘 남짓 남은 시간 동안 출국 준비를 한다는 건 그 당시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바오로 6세 교황님의 든든한 뒷배 덕분이었을까? 이틀 만에 여권을 받아 로마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2회기(1963년 9월 29일~12월 4일)가 한창 진행 중이어서 한국주교단은 로마에 가 있었다. 여권을 발급받기가 참 어려운 시절이었기에 로마에 계신 주교님들은 다들 ‘윤 주교님이 일정에 맞춰 오실 수 있을까’ 하고 염려했다고 한다.

로마에 도착해서도 숨 돌릴 틈이 없었다. 통상 거쳐야 할 주교 서임 전 1주일간의 피정도 생략해야 했다. 교황청에서는 당장 주교 복장부터 맞춰야 한다며 독촉했고, 부랴부랴 주문한 자주색 수단이 다행히도 이틀인가 사흘 만에 완성됐다. 그런데 아뿔사! 주교 버선은 만들어져 있는 것이 너무 커서 접고 또 접어 신어야 했다. 주교 임명 소식을 들은 순간부터 서품식을 마칠 때까지의 시간은 정신 차릴 새도 없이 흘러갔다.

1963년 10월 20일 주교 서품식 직전 바오로 6세 교황을 알현하는 윤공희 대주교. 광주대교구 제공

■ 해외 원조 모금과 최재선 주교

수원교구장으로 부임하고 처음 교구를 꾸리면서 외적으로 준비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20개의 본당, 24명의 사제, 이들 중 2명은 유학 등의 사유로 부재중이기도 했다. 신부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었다. 재정 상태는 말할 것도 없었다. 교구장 착좌 때 받은 축하예물이 수원교구의 첫 수입이었다.

교구장으로서 첫 과제를 인력 문제 해결, 즉 신학생 양성이라 생각하고 이에 주력했다. 교구민들에게 성소 개발을 간절히 호소했고, 신학생이 증가하면서 인력은 어느 정도 해결이 됐다. 하지만 재정은 여전히 큰 문제였다.

그 시절은 해외 원조와 모금을 통해서 전교를 하던 때였다. 나도 해마다 세계 곳곳을 다니며 모금을 했다. 로마 유학 때 인연을 맺은 외국의 신부들에게 해외 지역 교구나 본당에서 모금을 할 수 있게 허락해 달라고 부탁했다. 어떤 해엔 독일, 어떤 해엔 미국으로 갔다. 당시 주교들에게는 이런 모금 활동이 큰 고민이었다. 광주대교구의 현 하롤드 헨리(Harold Henry) 대주교님 같은 외국 주교님은 해외에서 원조를 많이 받아 오기도 하셨다.

한국인 주교님 중에서 특히 모금을 잘하셨던 분이 부산교구의 최재선 주교님이다. 최 주교님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중에도 주변에 도움을 청할 만한 외국 주교가 어디 있을까 하면서 살펴보기 바빴다. 다른 나라 주교들과 안면을 트기 위해 기막힌 방안도 마련했다. 공의회 기간 동안 매일 오전 총회가 시작되기 직전 참가 주교들은 모두 기념사진을 찍게 된다. 최 주교님은 이 기념사진을 구해, 그날 자신의 옆자리에서 사진을 함께 찍은 독일 주교님에게 사진을 선물하면서 도와달라는 부탁을 했다. 마침 그 주교님께선 전교 지방에 관심이 많은 분이었다. 총회가 없는 주일이면 그 주교님께선 전교 지역에서 온 주교들을 자신이 맡고 있는 독일의 교구 본당으로 보내 모금을 하도록 해주셨다.

또 한 분, 한국에서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도운 것으로 널리 알려진 슈왈츠(소 알로이시오, Aloysius Schwartz) 신부님도 모금하는 면에서는 유명한 분이었다. 슈왈츠 신부님은 당시 부산에서 사목하시면서 원조를 청하는 편지를 미국 전역으로 수천, 수만 통씩 굉장히 많이 보냈었다. 미국 전역에 그런데 편지를 받는 이들은 특별히 주교 서명이 직접 날인된 편지를 좋아했다. 최재선 주교님은 슈왈츠 신부님이 보내는 그 많은 편지에 서명을 하고, 심지어 고등학생 몇 명을 아르바이트로 구해 최 주교님의 친필 사인을 본뜨도록 배우게 해서 도움을 호소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다보니 몇몇 미국 주교들은 공의회 중에 한국 주교를 만나면 ‘도대체 한국의 비숍 초이(Bishop Choi, 최 주교)가 누구냐’고 수소문하기도 했다. 심지어 도움 호소 편지를 취급했던 부산 우체국장은 엄청난 해외우편 실적 덕분에 승진까지 했다고 한다. 어려운 시기였지만 이처럼 재미있는 일화들도 종종 있었다.

정리 남재성 기자 namjs@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