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한담

[일요한담] 알려지지 않은 김 추기경님의 유머 / 고영초

고영초 가시미로 건국대병원 신경외과 교수
입력일 2022-04-19 수정일 2022-04-19 발행일 2022-04-24 제 3291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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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상의원에서 의료 봉사를 시작한 1977년부터 25년 이상 봉사자 미사를 통해 고(故) 김수환 추기경님을 가까이서 뵐 수 있었다. 참으로 기쁘고 영광스러웠다. 솔직히 소신학교 학창 시절인 1968년 서울대교구장으로 오신 추기경님을 처음 뵈었을 때, 투박한 시골 아저씨 같은 모습에 실망도 했었기에 더욱 그렇다.

매년 봉사자와 가족을 위해 미사를 집전하시면서 우리에게 하셨던 강론 말씀들은 내가 오랫동안 전진상의원에서 의료 봉사를 지속할 수 있는 큰 힘이 되었다. 2009년 추기경님 선종 이후 추기경님의 지혜와 유머 가득한 일화들이 적지 않게 언론에 소개되어 많이 알려졌지만, 1989년 독일 함부르크 한인성당에서의 추기경님의 유머 넘치는 일화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나는 한림대학교 강남성심병원 조교수 시절인 1989년 2월, 뇌종양 첨단 수술 기법을 배우기 위해 독일 하노버에서 연수를 시작했다. 독일에 아는 분이 전혀 없어 독일 연수를 결정하면서 걱정이 많았는데, 로마에서 유학 중이던 동기생 정 신부님이 독일 함부르크 한인성당 신부님과 수녀님을 소개해 주었다. 하노버 공항 도착이 밤늦은 시간이었지만, 함부르크 한인성당 송 신부님께서 고맙게도 하노버 한인성당 회장과 함께 나를 마중 나오셨다.

그래서 나는 독일 유학생활 시작부터 하노버 한인교우회와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수요일 저녁마다 기도 모임을 만들어 10여 명의 한인교우회 회원들과 로사리오 기도를 함께 바쳤다. 성가 271번 ‘로사리오 기도드릴 때’라는 성가는 오래 전 독일에 온 하노버 교우들이 모르고 있어 가르쳐 드렸다. 송 신부님께서는 한 달에 한 번 하노버에 오셔서 미사를 드리고 교우들은 집에서 준비해온 음식으로 작은 잔치를 베풀었다.

그러던 차에 추기경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하노버 신자들 10여 명과 함께 함부르크 한인성당으로 올라간 것이었다. 추기경님께서는 로마에서의 추기경단 회의 참석 후 95세로 요양 중이던 한 독일 수녀님을 만나기 위해 오신 것이었다. 그 수녀님께서는 추기경님이 독일 뮌스터에서 공부를 하시던 때, 추기경님을 오랫동안 도와주셨던 분으로 함부르크 한인성당 근처 수도원에서 지내고 계셨다.

추기경님께서는 함부르크 한인성당에서 그 수녀님을 위한 미사를 독일어로 집전하셨는데, 추기경님의 수녀님을 배려하시는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미사 후 나는 추기경님과 송 신부님이 함께하신 저녁식사 자리에 초대되었다.

식사 후 차를 마시던 자리에서 송 신부님께서 추기경님께 어리광부리듯이 이런 질문을 하셨다. “추기경님, 우리나라도 이젠 민주화되었는데 투표로 주교님을 뽑으면 안 되겠습니까?”라고. 나는 무척 당황했다. 그런 황당한 질문을 받으시고도, 추기경님께선 잠깐 고개를 숙이시고 숙고하시는 듯한 표정을 지으시더니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래, 아무리 민주화되었다 하더라도 가정에서 아버지를 투표로 뽑는 걸 봤어?”라고 하셨는데, 추기경님의 지혜와 유머 감각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는 우문현답이었다. 6년 전 박일영 전 김수환추기경연구소 소장에게 추기경님에 대한 기억을 말하는 인터뷰에서 이런 추기경님 에피소드를 처음 얘기한 적이 있지만, 언론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추기경님의 일화라 이 자리를 빌려 소개한다.

고영초 가시미로 건국대병원 신경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