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번째 공의회 참석
1964년 제2회기는 수원교구장이 된 후에 열려, 나도 주교로서 공의회에 참석하게 됐다. 수원교구장 임명 관련해서도 이런저런 기억들이 많지만, 다음 회로 다루겠다.
처음 공의회 총회에 들어가니 주교들이 라틴어로 열띤 토론을 하고 있었다. 그땐 종교 자유에 관한 의안을 두고 토론이 한창이었는데, 각 국가와 지역마다 라틴어 발음이 미묘하게 차이 났던 것이 생각난다.
당시 미국에서 오신 유명한 추기경이 두 분 계셨다. 뉴욕대교구의 스펠만 추기경(Francis Joseph Spellman)과 보스턴대교구의 쿠싱 추기경(Richard James Cusing)이었다. 라틴어로 토론이 오가는 와중에 이 분이 Liberatus(자유)를 영어식으로 크게 소리 내어 좌중이 웃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당시 세간에선 미국 주교단에 대해, ‘공의회 내용도 잘 모르고 그저 참석해서 손만 들 것이다’고 비평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실제로 공의회에 참석한 각국 주교단 중에는 다른 주교가 발언할 때 집중하지 않거나 별로 의견을 내지 못하고 수동적으로만 참여하는 나 같은 이들도 꽤 있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분위기를 주도한 유명한 추기경이 한 분 계셨다. 바로 독일의 베아 추기경(Augustin Bea)이었다. 그분은 예수회 출신의 성서학자로 아주 진보적인 가치관을 지닌 훌륭한 리더 중 한 분이었다. 베아 추기경과 관련해선 또 한 가지 일화가 기억난다. 공의회가 한창일 때 로마 공항에 내리면 국가별로 항공사 광고가 훤하게 보였는데, 그중에 영국 항공사 베아(B.E.A-British European Airways) 즉 ‘영국유럽항공’의 광고판도 크게 붙어 있었다. ‘Fly BEA’, ‘베아에 타라’고 광고문구가 쓰여 있는데, 그걸 본 주교 중 누군가가 ‘우리도 베아에 올라타면 된다. 베아 추기경이 얘기하는 대로 따르면 된다’고 농담을 해 얘깃거리가 되기도 했다.
이 시기 가톨릭신문(당시 가톨릭시보)의 역할이 참으로 컸다. 당시 한국교회에서는 공의회 관련 정보를 얻을 길은 가톨릭신문밖에 없었다. 때마침 독일에서 해외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김수환 추기경님이 사장으로 계셨는데, 공의회에 대해 열심히 소개했다. 김 추기경님이 얼마나 열성을 가지고 임했는지, 나중에 얘기하길 ‘밥 먹는 시간도 그렇게 아까웠다’고 하더라. 김수환 추기경과 당시 유일한 교계신문이었던 가톨릭신문은 전례 개혁과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알리는 데 아주 큰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