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제4대 청주교구장 김종강 주교 임명] 특별 인터뷰

민경화 기자 mkh@catimes.kr, 박민규 기자
입력일 2022-03-23 수정일 2022-03-23 발행일 2022-03-27 제 3287호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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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위한 기도에 응답하며 이 길을 걸어가겠습니다”
교구장 발표 직후 두려움 앞서
하느님 이끄심 믿고 맡기기로 결심
청년 사목에 특히 관심 두고
이벽과 132위 시복에도 노력할 것

사진 박원희 기자

“최선을 다해 교구민들을 사랑하겠습니다. 부족한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길 바라며, 그 기도에 응답하며 걸어가겠습니다.”

제4대 청주교구장으로 임명된 김종강(시몬) 주교는 교구장으로서의 첫 마음을 이같이 밝혔다.

교구장 임명 발표 직후 마련한 교계언론과의 특별 인터뷰 자리에서 김 주교는 “교구장직을 수락한 직후에는 하느님께서 어디로 이끌어 가실지 모르겠다는 막막함에 두려움이 앞섰다”고 고백했다.

이어 “그런 마음을 장봉훈(가브리엘) 주교님께 털어놨을 때, ‘하느님께서 하실 일이니 맡겨 드려라’라는 답변을 듣고 두려워하는 마음마저 욕심이었다는 반성을 했다”며 “하느님의 이끄심을 믿고 내어 맡기기로 했다”고 전했다.

김 주교는 아직 구체적인 구상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먼저 교구를 위해 이 시대와 교회가 요청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이해하고 받아들여 실행하겠다고 밝혔다.

교구 청소년사목국장을 역임했던 김 주교는 청년 세대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강조했다. 그는 “모든 세대를 아울러 사랑해야 하는 것이 교회의 역할임이 분명하지만, 시급한 부분에 대한 사랑과 관심, 일치를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그런 면에서 교회 내 청년들은 교구 사목 1순위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김 주교는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신부와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의 시복에 관해서도 “그분들 삶을 되짚어보고 오늘날 새롭게 살아가자는 의미에서 시복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이는 한국교회의 큰 바람”이라고 강조했다. 또 “그분들의 신앙을 본받으려는 노력과 함께 조속한 시기에 시복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자”고 당부했다.

청주교구는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주 활동지였고 교구는 최 신부의 시복을 가장 먼저 추진한 바 있다. 아울러 김 주교는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시복 청원인이기도 하다.

인터뷰에서는 김 주교가 어떤 사제인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궁금해 하는 질문들도 이어졌다.

김 주교가 사제서품을 받은 이후의 삶 중 기억에 남는 시간으로, 로마 교황청립 성바오로 국제선교신학원에서 활동했던 때를 빼놓을 수가 없다. 김 주교는 특유의 친화력을 바탕으로 한국인 사제로는 처음으로 국제선교신학원 부원장직을 맡기도 했다.

김 주교는 이 시간에 관해 “그곳에서 학생으로 3년, 부원장으로 6년 등 총 9년의 기간 동안 전 세계 신부님들을 만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며 “그들과의 수많은 대화를 통해 사제로서 얼마나 안주하는 삶을 살고 있었는지 반성했고, 그 시간은 지금까지 사제로 살아오는 데 큰 자양분이 됐다”고 전했다.

또 “국제선교신학원은 한국 사제들이 유학을 가면 처음으로 가는 곳”이라며 “내가 무언가를 잘해서가 아니라 앞서 공부하신 많은 선배 사제들이 길을 잘 닦아놓았기에 부원장직을 맡을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김 주교는 대전가톨릭대 교수 시절도 회상하며 “가르치러 온 사람이 아니라 나의 성소를 살고자 왔다고 교수로서 첫 인사를 했던 기억이 난다”고 전했다.

김 주교의 주변 사람들은 그가 사제들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학생들 사이에서도 가장 인기 많은 교수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김 주교는 이에 관해 “그저 학생들과 함께 열심히 기도하고 운동하고 공부만 했다”면서 “교수로서가 아니라 같이 사는 사람으로서 학생들과 동반한 시간”이었다고 밝혔다. 특히 김 주교는 그때의 경험을 떠올리며 “교구장으로서도 교구민들과 더 많이 소통하고 함께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다짐을 재차 밝혔다.

김 주교는 말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기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인 사제로 정평이 나 있다. 하지만 본인은 그러한 평에 반론을 제기하며 웃었다.

“전 사제서품 성구조차 지키지 못할 약속이 될 것 같아, 마지막 순간에 급하게 정한 걸요.”

김 주교는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는 말씀을 성구로 정하긴 했지만 결국 그렇게 살지는 못했다”고 겸손하게 말하며 “주교 사목 표어 역시 실망을 드리지 않기 위해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주교는 “아버지께서 써 주신 가훈도 하느님과 사람을 사랑하라는 뜻의 ‘애주애인’(愛主愛人)이었다”며 “사제품을 받고도 특별할 것 없이 평범한 일상 안에서 그냥 그렇게 기도하고 진리를 찾아왔다”고 밝혔다. 이어 “그런 평범함 안에 구원이 있다고 생각하며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평범한 일상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 진리를 찾아가겠다”고 전했다.

평소 가장 좋아하는 성가가 ‘아무것도 너를’이라는 김 주교는 “교구장 임명 소식을 듣고 두렵기만 했던 시간을 보낼 때에도 이 노래가 많이 생각났다”고 말했다.

“성가 가사인 아빌라의 대 데레사 성녀의 기도처럼, 모든 것이 지나가고 하느님 영광이 내 안에 남을 것이라는 희망을 간직하며 지금 이 시간을 견디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그런 희망을 가지고 교구민들과 함께 걸어가겠습니다.”

3월 19일 교구장 임명 발표 직후 진행된 교계언론과의 특별 인터뷰.

■ 청주교구는…

1962년 정식 교구로 승격

본당 79개 공동체로 성장

충청북도 지역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이전이었다. 박해를 피해 숨어서 신앙을 지켜왔던 신자들은 1882년 이후 여러 곳에 공소를 세워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1896년 충북 감곡에 첫 본당이 생긴 뒤 5개 본당이 추가로 설립됐다. 1953년 서울대목구 소속 충북 감목대리구가 설정되자 전쟁으로 폐쇄된 증평본당을 제외한 감곡·옥천·청주·제천·교현본당이 메리놀 외방 전교회에 위임됐다.

1958년 청주대목구가 설정되면서 메리놀 외방 전교회 소속의 제임스 파디(야고보) 신부가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 교구로서의 기틀을 잡았다. 1962년 한국교회에 교계 제도가 설정되면서 정식 교구로 승격된 청주교구는 ‘가장 작은 이를 섬기고 이웃과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라는 기치를 내걸고 이웃으로,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

초대 교구장 파디 주교에 이어 1970년 교구장에 임명된 정진석(니콜라오) 주교는 교구의 사명을 실천하기 위해 애썼다. 특히 사회사업 분야에 관심을 기울이며 꽃동네(1982년)를 세우고, 양업고등학교, 충주맹아·농아학교 등의 교육사업, 청주성모병원(1998년)과 같은 의료사업까지 지역사회 안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나갔다.

아울러 한국인 사제 양성과 신앙의 내실화에도 힘쓴 결과 1998년 5월 30일 서울대교구장으로 임명될 때까지 본당 53개, 신자 10만8763명(복음화율 8.23%), 교구 사제 100명이라는 성장을 이뤘다.

정진석 주교의 뜻은 3대 교구장 장봉훈(가브리엘) 주교에 의해 가지를 뻗어나갔다. 1999년 교구장으로 임명된 장 주교는 교구의 미래 사목을 위하여 교구 시노드를 개최(2005-2008)하고 2008년 교구청사를 새로 건축했다. 아울러 충북재활원 인수, 양업교회사연구소와 복음화연구소 설립 등 내실을 기하기 위한 활동에도 힘썼다.

제천시와 단양군을 제외한 충북지역 일원을 관할하고 있는 청주교구는 2020년 말 현재 본당 79개, 신부 195명, 신자 17만 2238명(복음화율 11.7%)의 공동체로 성장했다.

민경화 기자 mkh@catimes.kr, 박민규 기자 pmink@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