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

「늙은 아버지와 고독한 아들」

입력일 2022-03-16 수정일 2022-03-16 발행일 2022-03-20 제 3286호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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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기현 주교 지음/192쪽/1만3000원/ 생활성서
자전적 이야기 통한 영적 성찰
타고난 해학으로 흥미롭게 풀어
하느님 자비에 관한 찬미의 고백
“자신의 얼룩조차 직면할 수 있는
사랑받은 사람만이 가능한 용기”

배기현 주교가 지난 2016년 6월 15일 소록도본당에서 신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부끄럽지만 정직하게!’

마산교구장 배기현(콘스탄틴) 주교는 「늙은 아버지와 고독한 아들」에서 정직하게 사는 길이 주님을 기리며 살아가는 유일한 신앙인의 자세라고 고백한다. 알콜 중독으로 ‘완전히 맛이 간’ 친구를 품에 안으면서도 스스로는 하느님께 완전히 본인을 맡기지 못하고 사는 인간임을 깨닫는 배 주교. 그는 이 친구를 통해 하느님께서 “훌륭한 신부인 듯 위선 속에 살아온 허영심을 깨우치게 해주신 것”이라고 고백한다.

그동안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아온 배 주교는 이 책에 37편의 에세이를 비롯 주교로서 발표한 교서와 담화문들 그리고 사랑하는 부모와 스승 이야기를 담았다. 배 주교가 처음으로 펴낸 책이다. 대구가톨릭대 최원오(빈첸시오) 교수의 서평으로 「늙은 아버지와 고독한 아들」을 소개한다.

주교님의 ‘고백록’

배기현 주교님께서 처음 책을 내셨다. 농담으로도 맑은 진심을 전하고 우스갯소리로도 철학과 신학의 핵심을 꿰뚫는 분이신데, 평소 하시는 말씀과 활자로 새겨진 글이 너무도 똑같아서 놀랍다. 총대리 신부 시절 주보에 연재했던 토막글과 주교로서 교회와 사회 문제에 관해 쓴 글을 한데 엮었고, 스승과 부모님을 향한 애틋한 마음도 간추렸다. 끝자락에는 “우리 신부만 봐요” 하며 어머니가 물려주신 일기장 아홉 권 가운데 마지막 두 편을 실었다. 시와 함께 쉬운 이야기로 풀어 쓴 담화문과 사목교서는 담백하면서도 울림이 크다.

나의 비참 하느님의 자비!

책의 중심은 아무래도 자전적 기록이다. 영문학자 아버지의 노름 끝에 ‘흔들고 태어난’ 출생의 비밀을 비롯해 서울 말씨의 19살 여인을 짝사랑한 소년의 ‘환상 교향곡,’ 중학교 1학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술 담배와 잡기로 여러 차례 정학을 당하고도 퇴학의 문턱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고등학교 시절의 아슬아슬한 ‘전과 기록’ 등 길고 진한 사춘기를 타고난 해학으로 복기한다. 공수부대 훈련 사고로 12년 만에 ‘턱걸이로’ 신학교를 졸업한 뒤 펼치는 사목 이야기도 눈물겹도록 재밌지만, 한가로운 무용담이 아니다. 허술하고 부끄러운 삶의 파편 속에 새겨진 하느님 자비와 섭리를 찾아가는 진솔한 영적 성찰이다.

“불량품인 너를 창조한 책임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내 직속 명단에 입적시켰다”는 사제 신원 의식은 “불쌍히 여기시어 뽑아 주셨다”(miserando atque eligendo)는 ‘자비의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목 표어와 결이 같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나는 결코 나를 기리려 하지 않았고, 오직 그분을 찬미하는 것이 내 뜻이었습니다.”(편지 213,6) 성인의 진심이 배 주교님의 마음처럼 느껴진다. 책 어디에도 성공담은 없다. 오히려 가련하고 불쌍한 존재, 결핍되고 비참한 인간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부끄러운 고백이 후렴처럼 반복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염치없는 세상에서 베드로의 뜨거운 눈물과 바오로의 투박한 질그릇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사도들의 후계자를 만나게 된다.

허약함의 영성

개인 병원을 접고 소록도로 들어가 오스트리아 수녀님들과 함께 아픈 사람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사셨던 어머니는 아들의 신앙과 성소의 질긴 연줄이었다. 어머니의 눈물 어린 기도는 아들의 탁한 피를 정화하는 ‘신장 투석기’였다. 심지어 ‘고독이라는 무서운 괴물과 맞닥뜨린’ 아들이 슬픈 결심을 열어 보였을 때도 “걱정하지 말고 신부 뜻대로 하세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느님 앞에 거짓 없이 진실하고 정직하게 사는 것뿐이라 생각해요”라며 오히려 아들의 눈물을 닦아 주시던 어머니는 영원한 사랑과 무한한 신뢰의 살아 있는 성사였다. 아들의 고독을 가장 잘 헤아리신 분은 어머니와 늙은 아버지였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 서러운 고독이 하느님을 만나는 은총의 자리라는 사실도 다정스레 일깨워주셨다.

“목욕하면 깨끗하나 살아 있는 몸이라 때가 끼면 또 씻듯이 흐르는 물처럼 소리 없이 이 일을 되풀이해야겠지요.” 책의 마지막 문장으로 삼은 어머니의 당부 말씀대로, 주교님은 세상살이에서 넘어지고 더러워진 누구라도 부디 절망하지 말고 훌훌 털고 다시 일어나라고 당신의 병고와 허약함마저 기꺼이 나누어 주신다. 허물 많은 내가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인생 여정을 40년 가까이 한결같이 동행해 주시는 마음이기도 하다. 이 책은 간소하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자비와 용서에 관한 아름답고 진솔한 찬미의 고백이다. 아무나 쓸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자신의 어둑한 얼룩조차 있는 그대로 대면할 수 있는 정직한 사람만의 몫이다.

“오직 사랑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진실함의 용기다.” 1600여 년 전 아우구스티누스가 주교 시절에 「고백록」을 썼듯, 우리 시대를 위한 배기현의 고백록이 나왔다. 그리하여 집어서 읽는 이는 저마다 거룩한 위로와 용기를 얻게 될 것이다.

최원오 빈첸시오(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