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신앙에세이]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느님 / 윤길운

윤길운 사비나,제2대리구 안양비산동본당
입력일 2022-02-16 수정일 2022-02-16 발행일 2022-02-20 제 3282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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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 전 소공동체 구역장을 맡았을 때의 일이다. 구역 재정이 모자라다 보니 모임 때 참석자들에게 소액의 회비를 걷어야 했는데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회비를 걷지 않는 다른 좋은 방법이 없을까 하고 궁리하던 끝에 유정란을 팔아 기금을 마련하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구역 회의를 통해 격주에 한 번씩 판매하기로 결정했다.

판매 전 우리 구역 식구들이 먹을 계란이니 품질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유정란 농장을 방문했다. 이후 각 가정의 주문을 받아 농장 직송으로 판매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신자들 호응이 크지 않았으나, 먹어본 이들이 신선도와 품질에 대해 입소문을 내면서 많은 판매가 이뤄졌다.

기금이 제법 쌓이면서 연말연시 구역 내 어려운 가정을 돕자는 의견이 모였다. 그래서 다섯 가구를 선정해 도움을 드렸다. 작은 나눔이지만 공동체가 함께하려는 따뜻한 마음이 녹아 나오는 것 같았다. 설 명절에는 아파트 주민 상대로 떡국 떡을 팔기로 하고 계란도 함께 팔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이 될 때까지 10% 정도밖에 물건이 팔리지 않았다. 찬바람이 불고 추워서 몸도 힘들었다. 그때 주머니에 손을 넣으니 잡히는 것이 있었다. “아, 그래. 묵주가 있었지. 성모님께 의탁해 볼 수밖에 없구나”하고 묵주알을 돌리며 성모님께 간구했다. 40여 단 정도 바쳐갈 때, 웬 고급 승용차 한 대가 오더니 창문이 열렸다.

“그 계란 진짜 유정란인가요?”

“네. 유정란이고요. 농장에서 직접 가져왔습니다.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한 기금을 마련하려고 파는 것입니다.”

“아, 그래요? 한 판만 주세요”하고는 사가지고 갔다. 그런데 잠시 후 그 차가 다시 와서 “계란 몇 판 있어요?”라고 물었다. “OO판 있어요” 하자, 그는 “그거 다 주세요”라고 했다.

남은 계란을 사가지고 가는 모습 속에서 “아, 성모님. 당신께서 이렇게 저와 함께해 주셨군요. 저희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하느님’ 감사합니다”하는 기도가 나왔다. 하느님께서 함께해 주신다는 그때의 체험과 용기는 이후 본당 소공동체위원장과 대리구 총연합회 회장직을 맡아 봉사를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세상도 많이 변했지만, 어려운 가정들을 보살피며 구역 식구들과 함께 기쁘게 온정 넘치게 봉사하던 그 시절이 행복으로 다가온다. 또 그 기억은 하느님께서 넘치도록 사랑을 주신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다.

윤길운 사비나,제2대리구 안양비산동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