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민족·화해·일치] 불파만 지파참 <不怕慢 只怕站> / 박천조

박천조 그레고리오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연구위원
입력일 2022-02-08 수정일 2022-02-08 발행일 2022-02-13 제 3281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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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파만 지파참(不怕慢 只怕站). 느림을 두려워하지 말고 멈춤을 두려워하라는 말입니다. 속도의 세상에 살고 있다 보니 갑자기 느려지면 두려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멈춰 있는 것입니다.

보통 일의 진행이 늦어질까 걱정하는 나머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느리더라도 앞으로 나아갈 것을 조언하기 위해 인용하는 문구입니다.

한반도 정세가 또 다시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돌이켜 보면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이 개최되기 전인 2017년만 해도 미국과 북한이 ‘로켓맨’, ‘늙다리’ 등 말 폭탄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경고했습니다. 다행히 평창동계올림픽 이후 각종 정상회담을 통해 2019년까지 상황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노이회담이 결렬된 이후 남북 간 합의도 이행되지 못한 채 많은 시간이 흘러 버렸습니다. 그래서인지 다시 2017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어느 분들은 결과만 보고 과거의 모든 대화 노력을 부정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동안의 노력은 모두 의미 없는 몸짓이었을까요? 아닙니다. 멈춰 있지 않았고 느리지만 조금씩 진전이 있었습니다. 여전히 싱가포르회담에서 천명한 북미 간 적대관계 청산의 정신은 남아 있고, 하노이회담에서 논의했던 비핵화와 관계개선을 위한 논의의 전제도 남아 있습니다.

남북 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상 간 합의가 이행되지 못한 데 대한 강한 불만이 연락사무소 폭파와 같은 부적절한 방식으로 표출되기도 했지만 그 이상의 긴장고조까지는 전개되지 않았습니다.

가끔 느리게 진행되는 것들에 대해 불같이 성질을 내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느린 것이 멈춘 것보다는 낫다는 말을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본인이 처한 상황이 그 정도의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국가와 국가 사이에도 이러한 모습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때 이 상황을 참지 못하는 국가에 대해서 해줘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느린 진행이 상대 국가에 대한 무시가 아님을 약속의 이행을 통해 보여 주는 것입니다. 느리게 진행될지언정 멈추거나 후퇴한 모습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문득 양광모 시인의 ‘멈추지 마라’는 시의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길이 멀어도/ 가야할 곳이 있는/ 달팽이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박천조 그레고리오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