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일요한담] 이 몸은 당신의 종입니다

함상혁(프란치스코) 신부 (수원교구 공도본당 주임)
입력일 2021-12-28 수정일 2021-12-28 발행일 2022-01-02 제 3276호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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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1월 어느 날 전화가 왔습니다. 누군가 하고 확인해 보니 가톨릭신문사의 ○○○ 기자님이었습니다. 말씀을 들어보니 가톨릭신문에 새로 연재되는 코너가 있는데 글을 좀 써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제가 작년에 「가톨릭신문 수원교구」에 ‘밀알하나’라는 글을 쓴 적이 있는데 그것이 나름 괜찮았던 모양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가 저도 글을 쓰며 도움이 된 것이 많았기에 글을 쓰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8회 글을 쓰면 된다는 말씀에 어떤 주제로 써야 할까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무엇인가 마음이 이상합니다. 마음속 어딘가에서 이상한 생각이 슬금슬금 피어납니다. “지난번에는 「가톨릭신문 수원교구」에 글을 썼지만 이번에는 메인무대로 진출하는 것인데 준비를 잘 해야겠군. 지난번 사진은 좀 별로였는데 이번에는 좀 잘 찍어야 되겠군” 하는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도 듭니다. “지난번에 글을 썼던 게 좀 괜찮았던 모양이군, 그러니까 또 글을 써 달라는 요청이 있었겠지” 무언가 우쭐한 기분이 듭니다. 그러면서 수십 년 전 초등학교 때의 기억까지 떠오릅니다. “맞아, 내가 국민학교 때 글짓기 대회에서 상을 받았었지. 역시 시간이 지나도 실력은 사라지지 않는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이것은 바로 영성의 대가들이 평생에 걸쳐 경계하고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했던 그것. 바로 ‘교만!’입니다. 찰나의 틈을 파고드는 교만의 덫은 참 피하기 어렵습니다. 강론을 준비할 때마다 참 신기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어느 날은 강론 준비가 잘 될 때가 있습니다.

물론 제 기준이지만 내용도 괜찮고 잘 준비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날은 신자들 반응이 영 시원찮습니다. 어떤 날은 강론 준비가 잘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망했다’ 생각하고 강론을 하는데 그런 날은 신자들 눈빛이 빛나고 ‘강론이 너무 좋았다’고 말씀해주십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보좌신부 때 주일학교 학생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수녀님과 교사들, 봉사자들이 힘을 합쳐 나중에는 많은 학생들이 성당을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 본당을 떠나 다른 본당에 갔더니 그곳도 학생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저는 좋은 경험이 있었기에, 그 본당에서도 ‘학생들을 늘릴 수 있다’고 자신있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잘 되지 않았습니다. 아직 본당에 적응이 안 돼서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더 다양한 방법으로 노력을 했는데 잘 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 지금 생각해보니 제 마음에는 교만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주일학교 사목을 잘 하는 신부이고 능력이 있는 신부니까 다 잘 할 수 있다”는 생각이 가득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교만하니 일이 잘 될리가 있겠습니까? 오늘 글을 쓰며 성모님 모습이 떠오릅니다.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성모님 마음은 어떠셨을까요? 특별한 선택을 받았다는 생각에 잠시 우쭐할 수도 있었을 텐데, 성모님은 지극히 겸손하십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성모님의 겸손을 기억하며 글을 마무리할 시점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좋을까요? 첫 번째 글을 마치며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음, 오늘 글도 편안하고 재미있게 잘 쓴 것 같다.”

더 조심해야겠습니다. 찰나의 틈을 파고드는 교만에 빠지지 않도록 더 조심해야겠습니다.

함상혁(프란치스코) 신부 (수원교구 공도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