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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화해·일치] 자주(自主)와 평화 / 강주석 신부

강주석 신부(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총무)
입력일 2021-12-01 수정일 2021-12-01 발행일 2021-12-05 제 3272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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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난 역사학자 김성칠은 1942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사학과에 입학했다가 강제징용됐다. 해방을 맞이한 그는 1946년 경성대학을 졸업하고 1947년 서울대 사학과에 전임강사로 부임했으나 전쟁 중인 1951년 영천 고향집에서 괴한의 저격으로 사망했다.

해방공간과 6·25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젊은 사학자는 어느 한편에 치우치지 않고 양심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당시 평안하지 못했던 세상에 대한 진솔한 마음을 일기로 남겼는데, 다음은 1946년 2월 8일 일기 중 일부다.

“미군 철로계의 증명서를 가졌으므로 미군 전용차에 타려다가 다른 군정청 조선인 관리들과 함께 가슴패기를 몹시 얻어맞았다. 가슴이 사뭇 떨리고 눈에 눈물이 핑 돈다. 개도야지처럼 함부로 얻어맞고 쫓겨나서 화차(貨車)에 가까스로 설 자리를 비집을 수 있었다.

소년 시절에 왜인 경찰에게 무지스레 얻어맞았고 이제 다시 미국 군인에게 이 봉변을 당했다. 약소민족의 설움이 새삼스레 뼈에 사무친다. 그래도 그때는 일정(日政)을 반항하다가 얻어맞았지만 이번엔 미군정에 빌붙어서 좀 편한 자리를 얻으려다가 이 봉변이다. 그들의 만행을 책하기보다도 내 지지리 못났음이 한스럽다.

아무리 몸이 고달프더라도 다른 동포들과 함께 붐비는 중에 고생하는 것이 옳은 것을, 그들의 증명서를 이용하려던 내 태도가 근본적으로 잘못이었다.”(김성칠 「역사 앞에서」 38~39쪽, 창작과 비평사)

해방 후에 3년간 실시됐던 미군정이 끝나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도 7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지만, 우리는 아직도 미국과 ‘평등한’ 관계를 맺어 보지 못했다. 과거 군정시기에 대한 평가가 정치권에서 진보와 보수 진영에 따라 논란이 되고 있으며, 현재 국가의 주권인 ‘전시작전권’ 환수가 요원한 것을 보면, 전쟁을 완전히 끝내지 못한 한반도에서는 북한만이 아니라 남한도 완전한 ‘정상국가’가 되지 못한 것은 아닐까 의문이 든다.

남북으로 분단된 채 제대로 독립하지 못한 우리 민족에게 미국의 영향력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강력하다. 남한도 그리고 사실은 북한도 늘 미국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태평양 건너에 있는 강대국의 의사(意思)는 아직 적대하는 남과 북 모두의 운명을 너무 긴밀하게 상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민족만을 우선하는 배타적인 민족주의가 아니라 어떤 국가가 상식적인 정의와 보편적인 평화를 영위하기 위해서라도 자주와 독립은 필수적이다. 적대적인 분단이 가져오는 폐해를 자주와 독립, 정의와 평화의 관점에서도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통일이 어려우니 그냥 이대로 살자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꼭 진지하게 성찰해 볼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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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석 신부(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