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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교회 역사이야기] (16) 중국 가톨릭의 대표 지성, 마상백(馬相伯)

최병욱(바오로) 강원대학교 인문학부 사학전공 강사
입력일 2021-11-09 수정일 2021-11-09 발행일 2021-11-14 제 3269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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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 문화에 탁월한 조예… 천주교 토착화 운동 선구자
전통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신앙에 바탕 둔 인생관 소유
예수회 운영 서회공학 입학
사제품 받고 교육활동 힘써
근현대 중국 교육·정치 견인

1937년의 마상백.

17세기 중국교회사 연구에서 서광계(徐光啓)의 역할이 중요하다면 19~20세기 중국교회사에서 반드시 거론돼야 할 인물이 마상백이다. 한때 예수회 신부이기도 했던 마상백은 근현대 중국에서 유명한 교육가이자 정치가였다. 진단학원(震旦學院), 복단대학(復旦大學) 설립자이기도 하며, 보인대학(輔仁大學) 설립에도 참여했다. 그는 1840년에 태어나 1939년까지 1세기를 살았던 사람으로 그의 일생은 중국 근현대사와 함께했다고 할 수 있다.

■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나다

마상백은 아편전쟁이 발발한 1840년 강소성(江蘇省) 단도현(丹徒縣)의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나 요셉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그의 가족은 대대로 천주교를 신봉했는데, 명나라 말기까지 집안 신앙 내력이 거슬러 올라간다. 마상백의 아버지는 젊은 시절 서당을 열어 학생들을 가르쳤고, 의술을 펼치는 등 유의(儒醫, 유학자로서 의술에 정통한 사람) 생활을 했다. 이런 이유로 전통 유교 사상도 마상백에게 자연스럽게 전해졌다. 또한 어머니 심씨(沈氏)의 독실한 천주교 신앙과 그것에 바탕을 둔 교육관은 그의 세계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마상백의 어린 시절에 그의 어머니는 매우 엄격히 교육했다. 그는 모친의 영향으로 사람들을 대할 때 무례하지 않고 야박하지 않게 됐다고 한다. 또한 마상백은 덕행 교육 이외에 천주교 신앙에 바탕을 둔 지식 교육도 받았는데, 그의 인생관과 세계관이 당시 중국사회의 전통적 관습에 얽매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천주교의 계몽으로 유년 시절부터 천자(天子)도 일반 사람들과 같고, 이 세상의 모든 존재를 조물주가 창조하고, 삶과 죽음이 하나이며,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함을 알고 있었던 것이 어린 시절의 천주교 가정교육에서 비롯됐음을 밝혔다.

■ 예수회 신부가 되다

마상백은 1851년 고향에서 상해(上海)로 왔고,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서회공학(徐匯公學, Collège Saint Ignace)에 입학했다. 서회공학은 1850년에 예수회가 상해에 설립한 최초의 서양 학교로 중국 최초로 서양식 모델에 따라 설립한 학교였다. 마상백은 서회공학에서 8년간 공부를 마치고 예수회가 1862년에 건립한 신학교에서 일련의 과정을 거쳐 1870년에 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사제로 서품됐다.

마상백은 서회공학과 신학교의 체계적인 교육과정을 통해 서양 고전 라틴어와 그리스어 그리고 서양 현대어인 프랑스어, 영어, 이탈리아어와 그들 문학에 정통했을 뿐만 아니라 자연과학, 심리학, 윤리, 음악, 철학과 신학에 대해서도 조예가 깊었다. 유년 때부터 중국 고전교육을 받았던 마상백이 다년간의 예수회 교육을 받고 30세가 됐을 때 이미 동서문화에 대한 조예를 갖추게 돼 후일 그가 중국 가톨릭의 대표 지성으로 발전하는 견실한 바탕이 됐다.

예수회가 설립한 서회공학(徐匯公學).

■ 사제복을 벗고 세속의 길로

당시 중국의 강남 선교지를 관할하던 예수회는 프랑스 예수회 소속이었으나 비프랑스 국적 선교사들도 가입돼 있었다. 그러나 다양한 국적의 선교사가 함께 모여 있어 마찰이 일어났는데, 그 모순은 1870년대에 폭발됐다. 당시 프랑스는 선교 보호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 천주교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프랑스 예수회는 당시 서회공학 교장을 맡으면서 중국인 학생들에게 중국 고전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이탈리아인 조톨리(Angelo Zottoli) 신부의 교육방식에 불만을 표출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마상백이 1871년에 서회공학 교장에 임명된 후, 그는 스승 조톨리 신부의 신념에 따라 중국인 학생들이 반드시 먼저 중국 고전을 배운 후에야 서양 학문을 배우도록 했다. 그러나 그가 학생들에 대한 중국 고전교육을 중시할 때 이미 예수회에서는 이러한 정책이 허용되지 않았다. 결국 그는 한직으로 밀려났고, 후에 예수회와 여러 차례 충돌을 겪은 후인 1876년에 예수회를 탈회했다. 이때 그의 나이 37세였다.

마상백은 사제복을 벗고 세속의 길로 간 20여 년간 양무운동(洋務運動, 19세기 후반에 중국 청나라에서 일어난 근대화 운동)의 현장에서 활동했다. 그는 다양한 유럽 언어에 능통해 양무파 고위 관료들에게 인정받아 외교가로서 활동했다. 일본 고베 주재 영사, 조선 국왕의 정치고문, 차관 문제 협의차 미국 파견 등의 외교 활동을 전개했다.

■ 다시 교회로

청일전쟁 패배 이후인 1895년 마상백은 정치의 길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는 교회를 떠난 후에 결혼해 아이도 있었지만 사제복을 벗은 것에 대한 회의가 자리 잡고 있었다. 1886년 그는 로마에 방문해 레오 13세 교황을 알현한 후 교회를 떠난 것에 대해 더욱 회의하기 시작했다. 또한 1894년 임신한 그의 부인이 사고로 목숨을 잃었고, 다음 해에 모친이 세상을 떠났다. 부인과 모친의 죽음을 경험한 후에 마상백은 다시 교회로 들어갔다.

1897년 그는 서가회의 예수회에 들어가 지금까지의 죄를 인정하고 독신생활의 회복을 맹세했다. 비록 마상백이 신부의 직무를 회복하지는 못했지만 예수회 또한 이전의 죄를 묻지 않고 그가 교회에 다시 들어오는 것을 환영했다.

그는 교회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교회 밖의 영역에서 많은 일을 했다. 개혁과 혁명, 그리고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의 정치적 역할에 최선을 다했고, 그의 실천적 행동은 천주교 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마상백의 두드러진 업적은 그의 교육 활동이었다. 진단학원과 복단공학(復旦公學, 현재의 복단대학)을 설립했고, 천주교 대학인 보인대학 설립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천주교인으로서 마상백은 무엇보다도 당시 중국 천주교의 상황을 변화시키고 개혁하고자 노력했다.

마상백이 손문(孫文)에게 복단대학 재단 이사 수락을 요청하는 글.

■ 중국 천주교의 토착화 주장

20세기에 들어서도 많은 중국인들은 천주교를 여전히 서양인의 종교 즉, ‘양교’(洋敎)로 간주했다. 마상백은 천주교를 ‘공교’(公敎)라고 했다. 공교는 보편성을 가진 종교이며 모두를 위한 종교라고 주장했다. 그는 모든 사람을 조물주에 의해 만들어진 똑같은 사람으로 보았다. 남녀노소, 부귀빈천, 동서양을 구분하지 않는 것이 공교라고 했다.

마상백은 천주교의 ‘양교’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서는 먼저 외국 선교사들이 중국 국적을 취득해야 하고 중국어를 배워 중국어로 선교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중국인 주교를 양성해 그들이 중국교회를 주도적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학문 선교를 주장하면서 천주교 대학 창립에 앞장섰으며, 마테오 리치의 적응주의적 방법으로 중국에서 천주교가 뿌리내릴 것을 주장했다. 마상백은 ‘양교’의 천주교가 토착화의 과정을 거치면 서양 종교가 아니라 중국사회에 융합돼 중국 종교가 될 것을 확신했다.

당시 중국 천주교 토착화 움직임에 마상백 역시 큰 역할을 했으며, 그의 중국 천주교 토착화에 대한 노력은 중국사회와 교황청의 광범위한 동의를 얻었다. 교황청은 1922년 코스탄티니(Celso Costantini)를 첫 교황사절로 중국에 파견해 중국 천주교의 토착화를 진행했고, 1926년에는 로마에서 6명의 중국인 주교가 서품됐다. 마상백은 오늘날 중국 대륙과 대만에서 중국 천주교 토착화 운동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최병욱(바오로) 강원대학교 인문학부 사학전공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