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주말 편지] 기구(祈求)에 대한 응답 / 신찬식

신찬식(미카엘) 시인
입력일 2021-10-05 수정일 2021-10-05 발행일 2021-10-10 제 3264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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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여 년 전 내가 영세를 했던 그 무렵 우리 교회는 라틴어로 미사를 봉헌했었다. “쌔클라 쌔클라멘토…오레무스…” 하며 시작되는 미사의 분위기는 사뭇 경건하고 신비로웠다. 무슨 뜻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미사의 신비감은 한층 더했던 것 같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우리말로 미사를 봉헌했을 때 처음에는 오히려 생소함마저 들었다가 차츰 친근한 의식으로 다가왔다.

당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비신 자여!…”로 시작되는 천주경(주님의 기도)을 비롯해 “천주여! 너가 나를 내시고…” 등 여러 기도문들의 어휘가 매우 생경하게 느껴지는 게 많았다. 라틴어 기도문이 영어와 불어 또는 중국어 등을 거쳐 번역되는 과정에서 문화적으로 순화되지 않고 날것 그대로 옮겨진 탓이리라 생각된다. 묵주기도는 매괴경이라 했는데 참 해괴하다 싶었다. ‘기구’(祈求)라는 말도 그때 알았다. 그 뜻이 기도와 별로 다르지 않았지만 나는 기도보다 기구라는 말을 더 선호했던 것 같다. 개신교 친구들 앞에서 기구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제법 유식한 척 티를 내곤 했던 것이다.

그런데 동네 이발소 대형 거울 위에 걸려있는 ‘기도하는 소녀상’(사실은 소녀가 아니고 소년이라고 하는데)은 ‘기구하는 소녀상’이 영 어울리지 않았고, 유명한 피아노곡 ‘소녀의 기도’도 마찬가지이다.

아무튼 나는 지금도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기도와 기구를 겨끔내기로 드리곤 한다. 실은 둘 다 같은 것이지만 말이다.

기도 또는 기구에 대한 놀라운 응답을 나는 베트남 전쟁에서 처음 경험했다. 인사행정사병으로 파견됐던 나는 베트콩(월남 공산 게릴라)과의 첫 전투에서 그야말로 혼비백산, 넋이 나가고 말았다. 자정 무렵, 적의 기습공격을 받고 재빨리 총을 챙겨 들고 야전천막 숙소 인근 철길 둑에 납작 엎드렸는데, 어떤 전우가 바로 내 옆에 바짝 다가와 엎드리는 거였다. 나는 얼른 평소 훈련을 통해 숙지하고 있던 대로 그와의 간격을 띄우기 위해 조금 옆으로 비켜 엎드렸는데, 전투상황이 종료되고 나서 살펴보니 처음 내가 엎드렸던 바로 그 지점에 박격포탄이 불발인 채 꽂혀 있는 게 아닌가! 기적이었다.

아침저녁으로 내가 간절히 바쳤던 기구와 고국의 부모님께서 한마음으로 드린 불공(당시 부모님은 불교신자였다)에 대한 응답이라고 나는 지금도 철석같이 믿고 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내가 드리는 기도의 핵심은 “아이쿠 하느님! 살려주이소. 용서해 주이소. 좀 도와 주이소”로 요약된다.

최초 전투 직후 나는 자신의 나약하고 무기력함을 스스로 깨닫고, 소총수를 자원하게 됐다. 수많은 수색정찰과 야간 잠복 임무를 수행하면서 손가락 하나 다치지 않았고, 적군을 확인사살한 적도 없다. 어느 날은 구멍난 군복 옷자락에서 겨드랑 사이로 빠져 날아간 탄환의 흔적을 발견하기도 했다.

야간잠복 근무 중에 적군 출몰 예상지역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미군 병사를 구출해낸 공로로 지금은 패망해버린 베트남공화국의 명예훈장을 받기도 했다. ‘남의 생명을 해치지 않겠사오니, 저의 생명도 지켜주소서!’ 이국의 전장에서 틈만 나면 바쳤던 나의 간절한 기구에 대해 하느님께서는 ‘무사귀국’으로 응답해 주신 것이라 믿고 있다.

사족이지만 ‘총알이 비켜가는 표적’이라고 쓴 머리띠를 철모에 두르고 있던 이름 모를 그 전우는 어찌 됐을까? 아마 탄환도 헛웃음이 나와 그를 피해 가지 않았을까? 그 뒤에도 나는 기적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수 없는 기도에 대한 주님의 응답을 두어 번 더 체험하게 된다.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신찬식(미카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