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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시간을 걷다] (16) 김대건, 현양하다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21-08-31 수정일 2021-09-01 발행일 2021-09-05 제 3260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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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중에도 조선교회 순교자 33명 행적 꼼꼼하게 기록
조선 순교 역사 라틴어로 기록 중국으로 건너가 보고서 전달
교회 창립 과정과 박해 전반 글과 그림으로 상세하게 묘사
독자적인 자료 확인과 조사로 순교자 현양하고 신앙 고백

김대건 신부는 배를 타고 중국으로 건너가 자신이 작성한 조선 순교 역사 관련 보고서를 스승 리브와 신부에게 전달했다. 전주교구 나바위성지에 복원돼 있는 라파엘호의 모습.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우리는 흔히 순교자들을 기억하고, 기념할 때 ‘현양한다’고 말한다. 현양(顯揚)은 사전적으로 ‘이름, 지위 따위를 세상에 높이 드러낸다’는 뜻이다. 하지만 신자들은 보통 복음을 전하고 신앙을 지키고자 기꺼이 죽음을 택한 순교자들을 공경하고, 순교자들의 행적을 널리 알려 신앙을 더욱 굳건하게 하는 일을 현양이라고 부른다. 여러 교구와 성지가 순교자 성월에 순교자현양대회를 마련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금은 우리가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를 현양하고 있지만, 생전 김대건은 누구보다도 순교자 현양에 앞장 선 인물이었다. 순교자들을 현양한 순교자, 김대건은 어떻게 순교자들을 현양했을까.

■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

“이제 조선교회의 순교자 수는 800명, 아니 그 이상을 헤아리게 됐습니다.”

1845년 7월 23일 한양에서 선교를 위한 준비 활동에 한창이던 김대건 부제는 스승인 리브와 신부에게 보낼 서한을 작성하면서 두툼한 보고서를 동봉했다. 바로 조선교회 순교자들에 관한 역사와 각 순교자들의 행적을 담은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이하 보고서)였다.

김대건이 1845년 3~4월 경 라틴어로 작성한 보고서에는 자그마치 33명 순교자들의 이름과 행적이 담겼다. 보고서의 분량 자체도 상당하다. 김대건의 서한들을 고(故) 정진석 추기경이 우리말로 번역하거나 다듬은 책 「이 빈들에 당신의 영광이」를 보면, 김대건이 쓴 전체 서한 중 보고서 분량이 1/6을 차지할 정도다.

크게 ‘조선 순교사에 관한 보고서’와 ‘조선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로 작성된 보고서는 ▲조선 교회 창립에 관한 개요 ▲1839년 기해박해의 진상 ▲1839년에 순교한 주요 순교자들의 행적 ▲1839년 서울에서 순교한 주요 순교자들의 행적 등의 내용으로 구성됐다. 김대건은 조선교회의 창립과정과 기해박해의 배경 및 전개 과정을 상세하게 기술했을 뿐 아니라 앵베르 주교를 비롯한 순교자들의 신앙 활동과 순교 과정도 보고서에 적었다. 또 조선에서 이뤄지는 문초와 순교가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순교에 관한 묘사와 조선의 형벌, 감옥, 재판에 대해서도 별도로 설명했고, 글만으로는 이해하기 난해한 부분은 직접 그림을 그려 묘사하기도 했다.

물론 보고서의 모든 내용을 김대건이 직접 조사한 것은 아니다. 김대건은 한양 체류 중 현석문(가롤로)을 만나 순교자들의 행적에 관한 자료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앵베르 주교는 1836년 조선에 입국해 활동하면서 순교자들의 행적을 수집하기 시작했고, 현석문과 이제의(토마스) 등에게 이 일을 맡겨, 앵베르 주교 자신이 순교한 후에도 순교자들에 관한 기록을 이어갈 수 있도록 했다. 이를 바탕으로 현석문이 「기해일기」를 편찬했다. 「기해일기」 원본은 유실됐고 사본만이 전해지고 있는데, 김대건의 보고서 중 순교자의 행적 부분이 이 「기해일기」와 많은 부분 유사하다.

그러나 김대건의 보고서는 단순히 「기해일기」의 번역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사학자들은 보고서의 앞부분, ‘조선 순교사에 관한 보고서’는 김대건의 순수한 저작으로 보고 있다. 동시대에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작성된 기해박해 관련 문서 중에서 이 내용은 김대건의 보고서에서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보고서에는 조선의 문화와 풍토, 정치 상황과 주요 위정자들의 사정, 그로 인한 천주교에 대한 조정의 태도 변화, 신자들의 상황에 이르기까지 조선교회 창립과 박해의 전말에 관한 내용이 상세하게 작성돼 있고, 이런 정황에 관한 김대건의 의견도 살필 수 있다.

또 순교자들의 행적 부분에서도 「기해일기」에 없는 사실들이 추가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김대건이 현석문의 자료를 많이 참고한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기존의 자료를 번역만 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독자적으로 자료의 확인과 조사를 거쳤던 것이다.

전주교구 익산 나바위성당에 있는 김대건 신부 동상.

■ 기록으로 순교자를 현양하다

김대건이 보고서를 작성할 수 있었던 시간은 불과 한 달여뿐이었다. 그리고 김대건의 임무는 순교자를 조사하는 것이 아니었다. 한양에 선교거점을 마련하고, 선교사들이 입국할 수 있도록 입국로를 조사해야 했고, 부제로서 신자들을 돌보고 신학생을 가르치는 일도 하고 있었다. 그마저도 조선 입국 후 상당히 중한 병에 걸려 한동안 몹시 앓아 누워있었던 상태였다. 김대건은 1845년 4월 7일 작성한 편지에서 “아직 눈병이 낫지 않았고, 요새는 머리를 겨우 쳐들고 있을 정도”로 회복됐다고 전하고 있다. 김대건이 그 바쁘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 순교자들의 기록을 남기고자 애쓴 이유는 무엇일까.

표면적으로 바로 알 수 있는 이유는 조선 순교자들의 행적을 알리기 위해서다. 당시 「기해일기」가 있기는 했지만, 보편교회에 그 내용이 알려지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김대건은 조선교회 순교 역사와 순교자들의 행적을 라틴어로 작성해 파리 외방 전교회에 전함으로써 세계에 조선 순교자들을 알렸다. 보고서는 김대건이 작성했을 당시부터 선교사들 사이에서 관심의 대상이 됐다. 본래 수신인인 리브와 신부에게 보내기도 전에 고틀랑 신부가 보고서를 읽어보고 싶어 했고, 이후 페레올 주교는 보고서를 참고해 시복재판을 위한 자료를 만들기도 했다.

무엇보다 김대건은 보고서를 작성하는 작업을 통해 순교자들을 현양했다. 그리고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고, 순교로써 지복직관(至福直觀)에 이르렀을 순교자들에게 조선교회를 위한 전구를 청했다. 이런 김대건의 마음은 보고서에서 앵베르 주교를 비롯한 선교사들의 순교행적 기록을 마친 후 남긴 기도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신들은 우리 아버지 하느님 곁에서 권능을 가진 분들이니 이제는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복되신 마리아께 당신들의 기도와 공로로 전구해 주십시오. 우리를 위해 구원에 필요한 것들을 얻어 주십시오. 하느님께 지금까지 흘린 순교자들의 피를 갚아주시도록 청해주십시오.”

■ 김대건의 시간을 함께 걸을 수 있는 곳 – 전주교구 나바위성지

전주교구 나바위성지(전라북도 익산시 망성면 나바위1길 146)는 사제품을 받은 김대건이 조선에 입국한 것을 기리며 조성된 성지다. 나바위성지에는 김대건 신부가 타고 온 배를 복원한 라파엘호가 있다. 김대건은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를 지닌 채 배를 타고 중국으로 건너가 보고서를 전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