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현장에서] 자연에서 만나는 거룩함 / 이승훈 기자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21-07-06 수정일 2021-07-06 발행일 2021-07-11 제 3253호 23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어디로 가야하지?”

고창의 개갑순교성지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성지 입구에서 어디로 갈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나름 전국의 여러 성지를 취재했다는 기자가 성지 입구에서 헤매다니 이런 망신이 따로 없다. 헤매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닌 ‘건물’이 보이지 않아서였다.

푸른 나무와 풀, 돌이 어우러진 길을 따라 들어갔더니 그 속에 있던 야외 십자가의 길이 슬며시 눈에 들어왔다. 거기서 조금 더 걸어가니 그제야 개갑순교성지 외양간경당의 입구가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 그마저도 자연의 풍광을 해칠세라 아담하고 자연의 모습에 어울리게 세워져있었다.

성지 담당 강석진 신부를 만나 이 이야기를 했더니 그는 “자연이 있고 그 다음에 성지가 있는 것 아니겠느냐”며 웃었다. 강 신부는 고창의 자연을 찍은 사진에 묵상을 담아 사람들을 순교영성으로 초대하고 있었다.

당연한 말을 한 것 같으면서도 선문답 같기도 한 강 신부의 말을 곱씹으니 내가 성지를 오해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순교자들이, 신앙선조들이 살아간 곳은 번듯한 건물보다는 자연에 가까웠을 것이다. 순교자들은 박해자들의 눈을 피해 산과 숲, 바로 자연 속으로 들어가 하느님을 찾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그 자리가 성지가 된 것인데, 자연을 앞에 두고 ‘건물’만 찾은 나는 영 엉뚱한 순례를 하려 한 셈이다.

신앙선조만이 아니다. 구약의 예언자들도 산을 올라 하느님을 만났고, 예수님 역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곤 하셨다.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산만큼 대표적인 자연환경이 있던가. 이쯤 되면 자연만큼 기도하기 좋은 곳도 없어 보인다. 올 여름엔 자연을 찾아 피서만 하지 말고 피정을 해보면 어떨까.

이승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