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서상돈 선생 선종 108주년에 부쳐

이경규(안드레아)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
입력일 2021-06-22 수정일 2021-06-23 발행일 2021-06-27 제 3251호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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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과 나눔’ 가톨릭 신앙으로 애국했던 진정한 선각자
화원 1만 평 기부·성모당 건축 등 현 대구대교구 발전에 기여
신앙인으로서 인권존중과 평등사상 아래 독립협회 운동 참여
국채보상운동 역시 국가위난 속에서 평소 신앙 신념을 실천
항상 가난한 이웃 돌보며 불의에 굴하지 않았던 민족운동가

2011년 4월 8일 대구대교구청에서 열린 서상돈 선생 흉상 제막식에서 대구대교구장 조환길 대주교가 흉상을 축복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오는 6월 30일은 1907년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민족운동가 고(故) 서상돈(徐相燉·아우구스티노·1850~1913) 선생 선종 108주년이다.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서상돈 선생은 국채보상운동을 통해 일제로부터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겠다는 꿈을 가진 선각자였으며, 대구대교구(당시 대구대목구) 발전 과정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서상돈 선생 선종 108주년을 맞으며 대구가톨릭대학교 안중근연구소 소장을 역임한 바 있는 이경규(안드레아) 대구가톨릭대학교 명예교수의 특별기고를 통해 서상돈 선생의 신앙과 민족정신을 자세히 살펴본다.

지난 2013년 6월 30일 서상돈 선생 선종 100주년 추모미사에서 대구대교구장 조환길 대주교는 “우리 교구가 오늘날 이렇게 성장하게 된 데는 두 분의 공로자가 있었는데 그 중 한 분은 안세화 드망즈 초대 주교이며, 다른 한 분은 교구청을 있게 한 서상돈 선생”이라고 천명했다. 또 다음의 「드망즈 주교 일기」를 통해서도 대구대교구에 있어 서상돈 선생의 위상을 엿볼 수 있다.

-1913년 6월 30일 월요일

나는 오늘 서울로 가야 했으나, 아침에 서 아오스딩(서상돈)이 사망했으므로 그의 장례식에 참석해야 했다. 그는 교구에 크게 봉사한 훌륭한 교우였다. 교구 또한 그에게 도움을 줬다. 그의 비범했던 장사 소질에도 불구하고, 로베르 신부의 제언과 관리들의 탐욕에 대한 보호가 없었더라면 그는 평범한 사람으로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부자가 되고나서 그는 좋은 일을 많이 했다. 대구의 주교관과 수녀원 부지의 대부분은 그가 기증한 것이다. 그의 기부를 이용해 교구를 지배해야 한다고 그에게 권유한 타산적인 아첨군들 때문에 그는 좀 입장이 난처했었다. 그래도 우리는 그의 덕을 입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에게 큰 감사를 하는 것이다.

-1913년 7월 2일 수요일

오늘 아침에 서 아오스딩의 장례식이 거행됐다. 로베르 신부가 미사를 드렸다. 나는 미사와 사도예절 사이에 강론대에 올라가서 그에 대한 찬사(讚辭)를 했다. 그의 생애는 장례식에 참석한 수많은 교우들과 외교인들에게 많은 교훈이 됐다. 로베르 신부와 김 요셉(金紋玉) 신부는 묘지까지 갔다.

오늘날 대구대교구청이 있기까지의 역사는 성모당 건립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서상돈 선생은 교구청 설립을 위해 종묘 화원 1만 평을 기부했다. 또 생의 마지막에 성모당 건축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드망즈 주교가 “주교관 대지에 주교 및 선교사들이 거처할 집과 신학교를 건축하게 해주시고, 준 주교좌성당이 되는 루르드의 성모성당을 증축할 수 있는 방도를 마련해 주시면, 나는 주교관 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리에 루르드의 성모굴과 가능한 한 비슷한 굴을 마련하고 모든 신자들에게 이곳에 순례하도록 내 있는 힘을 다할 것을 허원합니다”라고 한 말을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평상시 서상돈 선생은 “나의 전 재산은 하느님과 성모님의 것이다. 내가 모은 재산은 성당에 바치려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서상돈 선생의 모든 행적은 가톨릭 신앙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국채보상운동 발기도 가톨릭 신앙의 사순절 애긍시사에 기인하며, 국가위난이라는 절체절명의 시기에도 ‘책임과 나눔’의 정신을 실천에 옮기려고 했던 것이다.

국채보상운동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으로 2017년 등재됐는데, 이는 국채보상운동기록물에 나타나 있는 ‘책임과 나눔’의 정신이 오늘날의 시대정신이 되고 세계정신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1907년 국채보상운동을 통해 일제의 경제적 침탈을 전 국민적 에너지를 모아 저지하려고 했다. 또 1998년에는 IMF 경제위기를 ‘금 모으기 운동’을 통해 극복했으며, 2020년 닥쳐온 전례 없는 코로나 사태도 자선과 기부를 통해 잘 이겨내고 있다. 이는 우리 민족 잠재의식 속에 면면히 이어 온 ‘책임과 나눔’을 통한 국난극복의 정신이 있기 때문이다.

서상돈 선생은 가톨릭 신앙의 인권존중과 평등사상의 기초 위에 독립협회 운동에 참여했다. 선생이 국채보상운동에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온 그 바탕에는 대구대교구가 설립될 때까지 그가 행해온 수많은 기부활동과 자선활동이 있었다고 본다. 국채보상운동은 신자들의 사순절 절제운동 및 자선운동의 경험과, 대구 계산성당을 지으며 체험했던 근대적 모금의 놀라운 결과를 사회로 확대시킨 운동이었다. 즉 가난한 이웃과 함께하고 도와주는 정신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그 때문에 서상돈 선생의 사랑채에는 평소에도 많은 식객들이 기거했고, 서상돈 회장이 서거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장례식에 참석해 추모했다고 전해진다.

주지하다시피 국채보상운동은 선각적 발의와 발단을 주도한 서상돈 선생에 의해 발기됐다. 1907년 1월 29일 대구광문사 문회의 회명을 대동광문회(大東廣文會)라 개칭하기 위한 특별회의를 열고, 회의를 마친 후 그 자리에서 대동광문회의 회원이며 광문사의 부사장인 서상돈 선생이 국채보상 문제를 발의한 것이다. 담배를 끊어 국채를 상환하겠다는 뜻은 당시 대구에 있던 일본 상인들이 일본산 담배를 유통시키면서 폭리를 취한 것과도 연관이 있다고 할 것이다. 2월 21일 대구민의소(大邱民議所)에 단연회(斷烟會)를 설립하니, 창립총회에서 500원이 갹출됐다. 그리고 당일 북후정 군민대회를 거쳐 국채보상운동은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으로 확산되고, 해외동포들도 다수가 이 운동에 참여해 국민운동으로 전개됐으며 향후 3·1운동의 바탕이 됐다.

이러한 국채보상운동에 대해 단재 신채호 선생은 황성신문 1907년 2월 25일자 “담배를 끊어 국채를 갚자(斷煙報國債)”라는 논설을 통해 “이 소식은 참으로 장합니다. 이 소식은 참으로 진기합니다. (중략) 곧 뒷날 대한제국 독립사 첫머리 제1장에 대서특필하여 일월성신처럼 기록해야 할 것이 이 단연동맹회의 서상돈씨 등 여러분들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했다. 또한 함경도 단천군의 국채보상운동 발기인들이 만들어 알린 ‘국채보상가(國債報償歌)’는 서상돈 선생의 위상을 실감케 한다.

2013년 8월 대구 서상돈 선생 고택 앞에서 열린 선종 100주년 추모식. 이경규 교수 제공

“애국심이여, 애국심이여, 대구의 서상돈 공일세.

1300만 원의 국채를 갚기 위해 단연동맹회를 설립했네.”

서상돈 선생 선종 100주년 추모식을 대구 서상돈 고택 앞에서 거행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서상돈 회장의 후손인 서공석 신부를 비롯한 유족과 내빈,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관계자 등 다수가 참석했다. 본인이 서상돈 선생 연보를 읽어나가기 시작할 때 갑자기 억수같은 장대비가 내리고, 하늘에는 우레와 같은 천둥이 울었다. 나는 “하늘이 감응한 것인가?” 하고 반신반의했는데,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의 소식지가 「천둥소리」라는 것이 떠올려보니 우리의 미진한 노력을 하늘이 깨우치게 하려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신도 신앙의 모범이셨던 서상돈 선생의 행적을 본받고, 신앙인이요 애국자이며 선각자로서 서상돈 선생이 발의하신 국채보상운동의 ‘책임과 나눔’ 정신을 실천에 옮기며, 나아가 그 정신이 올바른 시대정신·세계정신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해야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이경규(안드레아)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