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정진석 추기경 선종] 회고담

입력일 2021-05-03 수정일 2021-05-04 발행일 2021-05-09 제 3244호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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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정진석 추기경은 자신에게는 엄격했지만 상대방에게는 너그러웠고, 항상 검소하게 생활을 하며 모든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누었다. 우리 사회에 큰 울림을 주고 선종한 정진석 추기경. 정 추기경과 깊은 인연을 맺었던 교회 내외 인물들로부터 정 추기경의 삶을 들어본다.

■ 메리놀 외방 전교회 한국지부 함제도 신부

“타인을 이해하고 많은 사랑 베풀어”

추기경님과 20여 년 함께해

큰형님처럼 따르고 존경

늘 인간다운 삶 강조하신 분

정진석 추기경님과 저는 형제 같은 사이였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지만 정 추기경님은 저에게 ‘큰형님’이나 마찬가지인 분입니다. 정 추기경님은 청주교구장으로 오시고 바로 저를 총대리로 임명하셨는데 제가 1989년까지 거의 20년 동안 총대리로 일하며 정 추기경님을 도와 드렸습니다.

나이로는 제가 두 살 아래였지만 사제품은 1년 먼저 받았습니다. 농담으로 추기경님께 “제가 주교님보다 사제 선배입니다”라고 말하면 추기경님은 “나는 주교예요”라고 웃으며 말씀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농담도 잘하셨습니다.

저는 1960년 사제품을 받자마자 한국에 입국해서 1961년부터 청주교구에서 줄곧 일했습니다. 제가 청주교구에서 먼저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 추기경님은 저에게 눈과 귀 역할을 해 달라고 부탁하셨던 것 같습니다. 정 추기경님을 도와 드리면서 저는 많은 것을 배웠고 그분을 큰형님처럼 따르며 존경했습니다. 정 추기경님께 가장 많이 배운 것은 ‘인간답게 사는 방법’이었습니다. 남들을 위하고 이해하고 인내하며 사는 법을 배웠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인간답게 살라”고 자주 말씀하시며 저에게 사랑을 많이 베풀어 주셨습니다. 오랫동안 함께 일했지만 저에게 화를 내시거나 나무라신 기억이 없습니다.

정 추기경님이 편찮으셨을 때, 아직 병원에 입원하시기 전인 올해 설에 병문안을 가서 뵈었습니다. 제가 청주교구 이야기를 하니까 추기경님이 옛날 일을 회상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정 추기경님께서 편찮으셔서 병원에 계시는 중에 어렵게 추기경님과 통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말씀을 하실 수는 없는 상태이셨는데 제가 인사드리고 추기경님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말씀드리니까 알아들으신 후 “응, 응”하고 답을 하셨습니다. 정 추기경님께서 말씀을 못 하시면서도 “응, 응”하고 답을 하시는 음성을 전화기로 듣고 있으니 오랜 세월 함께 고생하며 일했던 일들이 떠오르면서 저도 눈물이 흘렀습니다.

정 추기경님 선종하셨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참 많이 슬펐습니다. 큰형님 같았던 정 추기경님한테 사랑 많이 받아서 감사했습니다.

1980년 4월 17일 청주 수동성당에서 함께한 청주교구장 시절의 정진석 추기경(오른쪽)과 당시 청주교구 총대리 함제도 신부. 함 신부가 ‘교회와 교황을 위한’(Pro Ecclesia et Pontifice) 노력을 인정받아 교황훈장 받은 것을 기념하는 축하식 자리였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예수의 꽃동네 형제회 신상현 수사

“‘사랑 실천 위한 고통’ 가르침 떠올라”

꽃동네 모든 것 있게 한 은인

언제나 어려운 이들 위해 기부

마지막 소망 ‘최양업 신부 시복’

정진석 추기경께서는 청주교구장 28년간 작고 낡은 주교관에서 검소하게 절약하며 사셨습니다. 언젠가 교구청 앞에서 페인트 작업을 지켜보시던 추기경께서 “이게 10여 년 만에 처음 교구청에 칠을 새로 하는 거야. 이 정도면 손해 보는 건 아니지?” 하시면서 다정하게 웃어 주시던 모습이 제 마음에 잔잔한 감동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안 쓰고 아껴서 모은 돈을 매년 가난한 이들과 사회복지 시설에 기부하셨습니다.

추기경님은 꽃동네가 있기까지 모든 것을 해주신 잊을 수 없는 은인이십니다. 창설자 오웅진 신부를 사제로 서품해 주셨고, 꽃동네 설립을 축복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수도회의 시작을 인가해 주셨습니다. 꽃동네가 성장하면서 주변에서 걱정하는 분들에게 “꽃동네가 인간이 하는 일이라면 저절로 없어지게 될 것이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면 잘 되어 갈 것”이라며 모든 것을 성령께 의탁하셨습니다. 사랑을 가지고 아버지가 자녀를 믿어 주듯 꽃동네를 신뢰해 주셨습니다.

하루는 입퇴원을 반복하시는 추기경께 병문안을 갔더니,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려면 많은 고통을 겪어야 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꽃동네에서 30여 년 수도생활을 한 저에게 가슴 깊이 다가오는 가르침이었습니다. 교구장으로 42년을 사시고 은퇴하신 후에도 병상에서 치료와 시술 과정의 많은 고통을 감당하셨으며, 마지막 수개월 간은 진통제로도 조절되지 않는 심한 통증에 시달리셨습니다.

추기경께서는 치료 방법이 상충되는 두 가지 질병, 뇌경색과 복부대동맥류를 앓고 계셨습니다. 뇌경색으로 다른 이들에게 기나긴 간병의 부담을 주는 것보다는, 더 위험하더라도 대동맥류의 합병증을 감당하기를 선택하셨습니다. 결국 추기경께서는 복부대동맥류의 합병증이 생기면서 심한 통증에 시달리며 남은 고난을 채우셨습니다.

추기경께서는 사후 장기와 안구 기증을 약속하셨습니다. 병세가 심각해지자 혹시라도 장기를 사용 못하게 되면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 염려하셨습니다. 저는 최소한 안구는 사용할 수 있으며 실험용으로라도 쓰일 수 있으니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기뻐하시며, 꼭 기증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그 내용을 친필로 기록에 남기셨습니다.

임종을 예감하신 추기경께서는, 고통 중에도 마지막 소망은 최양업 신부님이 시복되고 성인이 되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당신의 병고가 시복 승인에 도움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신상현 수사(오른쪽)가 정진석 추기경을 찾아뵙고 추기경의 저서 「위대한 사명」을 들고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신상현 수사 제공

■ 추기경의 친구 고 최창락씨 아들 최병호(프란치스코)씨

“나누고 내어주는 세상 꿈꾸셨던 분”

항상 남을 배려하고 절제

섬김의 삶 실천하는 모습에

세상 바라보는 눈 달라져

정진석 추기경님은 제게 아버지 같은 분이셨습니다. 매년 일고여덟 번 정도 찾아뵙고 말씀을 나눴는데, 그러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참 많이 달라졌습니다.

정 추기경님의 삶은 한마디로 섬김과 나눔, 절제였습니다. 항상 제게 “병호야~ 나누며 살아야 한다”고 하셨어요. 또 하느님께 은총을 갈구하지만 말고 주님이 주신 소명을 어떻게 다할 것인지 고민하고 그렇게 살라고 하셨지요.

추기경님은 항상 한발 앞서 계셨습니다. 선친 말씀에 따르면 전쟁 끝나고 다들 자기 살 길 찾기 바빴는데, 그 와중에 추기경님은 어수선한 나라를 위해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셨답니다. 전쟁 중에 사람들이 처참하게 죽으며 인간 존엄성이 파괴되는 걸 보시고 이들에게 정신적 양식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하셨대요. 그래서 발명가 대신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정신적 풍요로움을 주는 사제가 되겠다고 결심하신 겁니다.

당신의 꿈을 포기하고 하신 이 결심은 바로 어제(선종일인 4월 27일)까지 이어지셨던 거 같습니다. 추기경님은 화려하게 겉으로 드러나시는 분은 아니지만 추기경님이 보여주신 삶은 누구든 쉽게 따라갈 수 없을 겁니다.

아버지가 들려주신 일화가 하나 생각납니다. 추기경님이 청주교구장 시절 아버지께서 찾아가 밥을 사시겠다고 했대요. 그런데 안 된다고 하셨대요. 친구라 괜찮지 않느냐고 설득해도 안 돼서 가실 때마다 교구청에서 같이 식사를 하셨답니다.

외식을 안 하시는 이유는 당신께 밥을 못 사주는 사람들이 미안해 할까봐 였대요. 당신 입장보다는 상대방 입장을 먼저 배려하신 거죠. 추기경이 되신 뒤에도 항상 스스로를 낮추시고 절제하셨는데, 그 때마다 옆에서 부끄러움을 참 많이 느꼈습니다.

추기경님을 마지막으로 뵌 건 최근 병상에 계실 때였어요. 저도 추기경님 따라 좋은 일을 하고 싶어 1년6개월 정도 소아암 환자들을 위해 머리카락을 길렀어요. 그걸 말씀드렸더니 아프신 와중에도 기도를 해주시더라고요. 제가 아니라 제 가발을 받을 소아암 투병 중인 아이를 위해서 말이에요. 나누고 내어주는 삶, 아픈 이를 위해 기도하는 삶, 이게 바로 추기경님이 꿈꾸시던 세상인 것 같습니다.

최병호씨가 올해 초 신년 인사를 위해 정진석 추기경을 만나 환담하고 있다.. 최병호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