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더 쉬운 사회교리 해설-세상의 빛] 115. 가치에 대한 성찰 - 올바른 희망이란 무엇일까 2. 희망의 시작이자 열매, 나눔

이주형 신부(서울대교구 사목국 성서못자리)
입력일 2021-04-13 수정일 2021-04-13 발행일 2021-04-18 제 3240호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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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나요?
「간추린 사회교리」 578항
토빗기가 말하는 신앙의 핵심
하느님·이웃에 대한 사랑 실천 
인간 삶 떠받치는 보편적 희망

2020년 5월 미국 디트로이트에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 센터에서 한 의료인이 노숙인을 돌보고 있다. CNS 자료사진

“네가 가진 만큼, 많으면 많은 대로 자선을 베풀어라. 네가 가진 것이 적으면 적은 대로 자선을 베풀기를 두려워하지 마라. 네가 곤궁에 빠지게 되는 날을 위하여 좋은 보물을 쌓아 두는 것이다. 자선은 사람을 죽음에서 구해 주고 암흑에 빠져 들지 않게 해 준다. 사실 자선을 베푸는 모든 이에게는 그 자선이 지극히 높으신 분 앞에 바치는 훌륭한 예물이 된다.”(토빗 4,7-11)

■ 토빗과 사라

구약의 토빗기는 토빗과 토비야, 사라라는 인물이 겪는 기구하고 파란만장한 삶을 배경으로 하느님의 섭리와 인간의 길을 그려내는 매우 감동적인 작품입니다. 경건했던 토빗은 아시리아의 포로로 끌려와 고달픈 타향살이를 합니다. 그 와중에 그는 가난한 이들을 돌보고 심지어 죽은 동포들의 시신을 묻어 주기도 하지만 불행하게도 어느날 시력을 잃게 됩니다.

사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는 불행하게도 남편을 일곱 번이나 잃었고 주변의 조롱을 받아 모멸감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토빗과 사라 모두 하느님을 잊지 않고 살았으며, 하느님께 대한 희망을 품고 살았고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힘과 용기를 줍니다. 토빗과 사라는 오늘날로 치자면 물론 토빗과 사라가 당연히 더 힘든 처지였겠지만 동남아 혹은 중동지방에서 온 가난한 외국인 노동자 같은 처지라고나 할까요? 멀고먼 이국땅에서 힘들고 위험한 일을 하며 주변의 멸시를 받고 고단하게 사는 분들처럼 말입니다. 또는 극심한 고통과 어려움을 겪는 우리의 처지를 반영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 토빗기의 가치: 배타성이 아닌 사랑

토빗기는 기원전 734∼612년 아시리아의 이스라엘 침략을 상세하게 묘사하며 역사책 같은 느낌을 주지만 사료적 정확도는 결여돼 있습니다. 하지만 학자들은 저자가 실제 역사를 기록했다기보다 유배 중 이스라엘 백성에게 깨달음과 교훈을 주려는 의도로 저술했다고 추측합니다. 그런데 토빗기의 신학적 가치는 참으로 위대합니다. 토빗기는 하느님을 믿는 이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데 그 핵심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며 이것이 인간의 삶을 떠받치는 보편적 희망이라고 내다보았기 때문입니다.

“자선을 베푸는 모든 이에게는 그 자선이 지극히 높으신 분 앞에 바치는 훌륭한 예물이 된다”(4,11) 라고 하듯 포로로 끌려간 토빗이 유배지에서 할 수 있는 신앙은 바로 선행과 자선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배 이후 유다인들의 희망은 성전의 재건과 율법이었는데 이것이 자칫 이방인에 대한 신학적 폐쇄성과 극단적 배타주의로 흐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토빗기를 포함한 룻기, 요나서 등은 모든 이를 향한 하느님 구원의 보편성, 선행과 이웃사랑의 실천을 제시합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큰 가르침을 줍니다.

■ 희망을 위한 나눔

얼마 전 친한 후배 신부님과 이야길 나누다, 그 신부님께서 보이지 않게 좋은 일을 하시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주변에서 그런 분들을 종종 봅니다. 놀라운 것은 그분들이 넉넉하고 풍요로워서가 아니라 자신도 부족한데 선행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선거가 끝났습니다. 선거는 유권자의 이해관계가 반영되고 저마다 처한 어려움이 다르기에 그에 대한 평가나 술회, 소견은 서로 다를 것입니다. 분명 이번 선거도 현 상황에 대한 아쉬움과 더 나은 사회에 대한 염원이 교차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삶의 자리에서 우리가 좀 더 큰 가치를 지향하며 올바른 방향으로 가려 하는지 성찰해야 합니다. 그게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바로 함께 살아가는 세상, 나누며 도와주는 사회입니다. 얼마 전 어떤 정당의 대표가 “대의보다 소의, 책임보다 변명, 자강보다 외풍, 내실보다 명분에 치중하는 정당에는 미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 이타적 태도와 나눔 없이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회 역시 미래도 희망도 없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희망은 하느님께 두는 것이면서, 동시에 하느님과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데서 얻어집니다.

“인간은 이러한 믿음을 통하여 자기를 온전히 하느님께 자유로이 맡기며, 자기 형제자매들에 대한 구체적인 사랑과 우리에게 약속을 주신 분은 진실한 분이시므로 흔들리지 않는 희망으로 하느님께서 먼저 베풀어 주시는 풍성한 사랑에 응답한다.”(「간추린 사회교리」 39항)

이주형 신부(서울대교구 사목국 성서못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