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자’ 마테오 리치, 본격적인 중국 천주교 시대를 열다 1582년 마카오 거쳐 중국 입국 ‘서역에서 온 승려’로 자처했던 전임자 루지에리 신부와 달리 유학자 입장에서 선교하며 중국인들 마음 여는 데 성공 뛰어난 학식과 언어 능력으로 사대부들로부터 큰 호응 얻어
■ ‘숨겨진’ 이야기 둘: 구태소
리치는 처음 루지에리가 정착시킨 불교 승려라는 꼬리표를 떼고 불교와의 차별성을 드러내는 방법에 골몰했다. 이에 리치는 승려, 불교와의 차이를 강조하고 유학자와 유교 사상과의 친연성(親緣性, 친척으로 맺어진 인연과 같은 성질)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예수회와 천주교의 이미지를 새롭게 구축할 필요성을 느꼈다. 여기에서 결정적인 조력자 역할을 한 것이 구태소(瞿太素)라는 중국인 사대부다. 소주(蘇州) 출신 명망가 집안의 선비인 그는 1589년 자오칭에서 리치를 처음 만난 뒤로 핵심 조력자 역할을 했다. 리치와 막역한 친구 사이가 된 구태소는 승복이 아니라 유학자의 복식을 갖춰야 한다고 조언했고, 리치는 이를 전격적으로 수용했다. 1595년 리치는 마침내 승복을 벗고 중국 선비의 복장을 선택했음을 공식화하는 보고서를 로마에 전달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학자로서 예수회 선교사의 모습은 이때부터 비롯된 것이다. ■ ‘숨겨진’ 이야기 셋: 「천주교요」 예수회 선교사들이 유학자로서 자기규정을 변모시키면서 중국에서의 선교 성과는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여기서 리치 신부의 뛰어난 학식과 언어 능력이 빛을 발했다. 리치는 단순히 겉모습만 변모시킨 것이 아니라 정말로 유학자가 갖춰야 할 중국 고전을 섭렵했고, 더 나아가 당시 중국인들의 최대 관심사였던 기억법, 수학, 지도제작, 천문역법 등 실용적인 학문에 능통했기 때문에 학식이 있는 중국인 사대부들이 너도나도 그를 만나보고 싶어 했다. 초기에 주로 실용서와 윤리서를 저술하면서 관심을 끌었던 리치는 마침내 중국인들에게 천주교 신앙을 소개하는 교리서인 「천주실의」를 저술했다. 「천주성교실록」의 시행착오에서 나타났던 불교 색채를 수정하고 천주존재 증명, 영혼론, 불교 비판론 등 중국인 유학자의 사유체계에 접근할 수 있는 매우 논리적이고 정밀한 담론을 구성했다. 16세기 말까지는 필사본으로, 1603년에는 정식 인쇄본으로 출간돼 중국뿐만 아니라 조선, 일본, 베트남에 이르기까지 전해져 아시아 천주교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그런데 「천주실의」만큼 알려지지 않았지만 또 하나의 중요한 교리서 저술인 「천주교요」(天主敎要)가 있었다. 흔히 「요리문답」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천주교요」는 1605년경 중국 선교구 책임자인 리치의 주도 하에 동료 선교사들과 협업해 완성한 소책자 교리서다. 여기에는 「천주실의」에서 거의 언급이 없는 구체적 교리들, 예컨대 주요 기도문과 삼위일체, 7성사 등의 교리가 빠짐없이 포함돼 있다. 많은 사람이 오해하는 것과 달리 리치는 천주교 교리를 설파하는 데에 소극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첫 단계로 「천주실의」를 통해 신앙에 마음을 열고, 다음 단계인 입교의 과정을 위해 구체적인 교리를 담은 「천주교요」를 저술, 유통했다. 너무나 유명해서 누구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리치 신부의 이야기에도 ‘숨겨진’ 이야기들이 있었다. 앞으로도 계속될 아시아천주교사연구회 연재 칼럼을 통해 독자들이 이러한 숨겨진 이야기들을 다시금 알게 되기를 소망한다.신주현(프란치스코) 한국교회사연구소 선임연구원,연세대학교 사학과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