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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교회 역사이야기] (2) 마테오 리치 신부와 중국교회의 ‘숨겨진’ 이야기

신주현(프란치스코) 한국교회사연구소 선임연구원,연세대학교 사학과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치고
입력일 2021-04-13 수정일 2021-05-18 발행일 2021-04-18 제 3240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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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자’ 마테오 리치, 본격적인 중국 천주교 시대를 열다
1582년 마카오 거쳐 중국 입국
‘서역에서 온 승려’로 자처했던 전임자 루지에리 신부와 달리
유학자 입장에서 선교하며 중국인들 마음 여는 데 성공
뛰어난 학식과 언어 능력으로 사대부들로부터 큰 호응 얻어

마테오 리치가 최초로 지은 소성당 자리에 지금의 선무문 천주당, 즉 남당이 자리하고 있다. 지금의 남당은 1900년 의화단 사건으로 훼손됐다가 1904년 새롭게 지어진 건물로 ‘원죄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를 주보로 모신 주교좌대성당이다. 대성당 입구에는 지금도 리치 신부를 기억하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중국교회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예수회 마테오 리치 신부다. 리치 신부는 중국 선교의 상징적 인물로 여겨진다. 한국천주교 역사의 시작이 중국교회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국교회도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리치 신부와 무관하다고 볼 수 없는 이유다. 리치 신부의 발자취와 그를 도운 조력자들을 살펴 본다.

■ 선무문 천주당, 혹은 남당

중국 베이징 선무문 근처 시내 한복판에는 흔히 남당(南堂), 즉 남쪽 천주당이라고 불리는 바로크 양식의 대성당이 하나 자리하고 있다. 바로 중국 천주교회의 시작을 논할 때 가장 많이 회자되는 인물 중 하나인 마테오 리치 신부(Matteo Ricci, 중국명 利瑪竇, 1552~1610)가 1605년에 세운 성당이다. 물론 현재 우리가 보는 웅장한 건물은 리치 시대의 모습과는 다르다.

지금의 대성당 건물은 세 차례 중건을 거쳐 20세기 초에 네 번째로 지어진 100년 남짓한 것이고, 최초 그 자리에 리치 신부가 세운 천주당은 중국 전통 가옥 지붕에 십자가를 올려세운 소성당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누군가가 오늘날의 이 ‘선무문 천주당’ 건물을 보며 리치의 숨결을 느낀다고 한다면 엄밀히는 맞지 않는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남당은 리치 신부의 이름과 함께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로 일컬어지곤 한다.

■ 하비에르 성인의 뒤를 이어

어쩌면 중국 선교를 이룩할 사명을 타고 난 것이었을까. 리치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이 중국 내륙 땅을 밟아 보지 못하고 상천도에서 선종한 바로 그해인 1552년 이탈리아 마체라타에서 태어났다. 마치 하비에르의 못 다한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말이다. 1571년 예수회에 입회한 리치는 외지 선교에 대한 그의 열망이 받아들여져 1578년 포르투갈 리스본을 출발해 아시아로 향했다. 인도의 고아와 말라카를 거쳐 1582년 마침내 마카오에 도착했다. 그의 중국 선교 여정의 시작이었다.

■ ‘숨겨진’ 이야기 하나: 미켈레 루지에리 신부

리치라는 걸출한 예수회 선교사가 거둔 성과는 그와 함께했던 여러 조력자들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다. 먼저 리치보다 앞서 중국 선교를 시작했던 예수회 선교사 미켈레 루지에리(Michele Ruggieri, 중국명 羅明堅, 1543~1607) 신부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1578년 리치와 함께 리스본을 출발하는 배에 올라 출항했던 루지에리는 리치가 마카오에 도착하기 전 인도의 고아(Goa) 지역을 경유하며 사제품을 받고 교사로서 일을 하는 동안 먼저 마카오에 도착해 중국어를 익히고 본격적인 선교를 준비했다. 1582년에야 마카오에 합류한 리치 신부는 루지에리에 의지하며 중국어를 익혔고, 마침내 광동성 자오칭(肇慶)에 첫발을 함께 내딛을 수 있었다.

루지에리 신부의 업적은 단순히 리치에 몇 년 앞서 중국 선교를 준비했던 것만이 아니었다. 그는 최초로 십계명을 중국어로 번역하고 해설해 보급했고, 「천주실의」(天主實義)보다 10년 이상 앞선 1584년 「천주성교실록」(天主聖敎實錄)이라는 최초의 중국어 교리서를 집필했다. 사실상 중국 선교의 ‘최초’ 타이틀은 루지에리에게 돌아갈 것이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리치를 중심으로 중국 천주교회의 시작을 기억하고, 루지에리 신부의 자리는 희미해져버린 것일까. 첫째는 루지에리의 최초 선교 과정에서 나타난 시행착오 때문이었다. 루지에리는 승복을 입고 자신을 ‘서역에서 온 승려’로 소개했고 실제 「천주성교실록」에도 불교 용어를 많이 사용했는데, 이는 그 당시부터 상당히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다. 둘째는 역시 걸출한 후배인 리치 신부가 다방면의 능력과 업적을 남겼던 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뛰어난 후배 신부의 그림자에 가려져 첫 선교사 루지에리는 잊히고 말았다.

유학자 복식을 한 마테오 리치의 초상. 승복을 벗고 유학자로 예수회 선교사의 정체성을 구현한 중대한 전환에는 리치의 헌신적인 조력자인 구태소의 조언이 역할을 했다.

마테오 리치의 무덤. 마테오 리치는 1610년 사후 그의 업적을 인정받아 황제로부터 장지를 하사받았다. 잘란(柵欄)이라 불리는 이곳은 리치 후대 선교사들의 묘지로도 줄곧 사용됐다. 현재는 베이징 행정학원 원내에 자리잡고 있다.

■ ‘숨겨진’ 이야기 둘: 구태소

리치는 처음 루지에리가 정착시킨 불교 승려라는 꼬리표를 떼고 불교와의 차별성을 드러내는 방법에 골몰했다. 이에 리치는 승려, 불교와의 차이를 강조하고 유학자와 유교 사상과의 친연성(親緣性, 친척으로 맺어진 인연과 같은 성질)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예수회와 천주교의 이미지를 새롭게 구축할 필요성을 느꼈다.

여기에서 결정적인 조력자 역할을 한 것이 구태소(瞿太素)라는 중국인 사대부다. 소주(蘇州) 출신 명망가 집안의 선비인 그는 1589년 자오칭에서 리치를 처음 만난 뒤로 핵심 조력자 역할을 했다. 리치와 막역한 친구 사이가 된 구태소는 승복이 아니라 유학자의 복식을 갖춰야 한다고 조언했고, 리치는 이를 전격적으로 수용했다. 1595년 리치는 마침내 승복을 벗고 중국 선비의 복장을 선택했음을 공식화하는 보고서를 로마에 전달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학자로서 예수회 선교사의 모습은 이때부터 비롯된 것이다.

■ ‘숨겨진’ 이야기 셋: 「천주교요」

예수회 선교사들이 유학자로서 자기규정을 변모시키면서 중국에서의 선교 성과는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여기서 리치 신부의 뛰어난 학식과 언어 능력이 빛을 발했다. 리치는 단순히 겉모습만 변모시킨 것이 아니라 정말로 유학자가 갖춰야 할 중국 고전을 섭렵했고, 더 나아가 당시 중국인들의 최대 관심사였던 기억법, 수학, 지도제작, 천문역법 등 실용적인 학문에 능통했기 때문에 학식이 있는 중국인 사대부들이 너도나도 그를 만나보고 싶어 했다.

초기에 주로 실용서와 윤리서를 저술하면서 관심을 끌었던 리치는 마침내 중국인들에게 천주교 신앙을 소개하는 교리서인 「천주실의」를 저술했다. 「천주성교실록」의 시행착오에서 나타났던 불교 색채를 수정하고 천주존재 증명, 영혼론, 불교 비판론 등 중국인 유학자의 사유체계에 접근할 수 있는 매우 논리적이고 정밀한 담론을 구성했다. 16세기 말까지는 필사본으로, 1603년에는 정식 인쇄본으로 출간돼 중국뿐만 아니라 조선, 일본, 베트남에 이르기까지 전해져 아시아 천주교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그런데 「천주실의」만큼 알려지지 않았지만 또 하나의 중요한 교리서 저술인 「천주교요」(天主敎要)가 있었다. 흔히 「요리문답」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천주교요」는 1605년경 중국 선교구 책임자인 리치의 주도 하에 동료 선교사들과 협업해 완성한 소책자 교리서다. 여기에는 「천주실의」에서 거의 언급이 없는 구체적 교리들, 예컨대 주요 기도문과 삼위일체, 7성사 등의 교리가 빠짐없이 포함돼 있다. 많은 사람이 오해하는 것과 달리 리치는 천주교 교리를 설파하는 데에 소극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첫 단계로 「천주실의」를 통해 신앙에 마음을 열고, 다음 단계인 입교의 과정을 위해 구체적인 교리를 담은 「천주교요」를 저술, 유통했다.

너무나 유명해서 누구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리치 신부의 이야기에도 ‘숨겨진’ 이야기들이 있었다. 앞으로도 계속될 아시아천주교사연구회 연재 칼럼을 통해 독자들이 이러한 숨겨진 이야기들을 다시금 알게 되기를 소망한다.

신주현(프란치스코) 한국교회사연구소 선임연구원,연세대학교 사학과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