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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8) 누군가에게 교회가 되어준다는 것은

정희완 신부 (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
입력일 2021-04-13 수정일 2021-04-14 발행일 2021-04-18 제 3240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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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연대에서 오는 친밀감으로 슬픔과 기쁨 함께하는 일
교회는 하느님 백성으로 구성
목적과 작동 원리는 ‘친교’
주님 향한 여정 속에 교회 있고교계제도도 이를 위해 존재
사람들과 삶의 여정 함께하며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교회
올바른 신앙적 지향 공유하며 타자의 아픔과 슬픔 공감하고 기쁨마저 함께할 수 있어야

교회가 된다는 것은 주님과 함께 또 사람들과 함께 삶의 여정을 걸어간다는 것이며, 슬픔뿐만 아니라 기쁨마저도 함께하는 일이다.

■ 교회라는 말에 관한 슬픈 기억

솔직하게 고백하면, 교회라는 말은 따뜻하기보다는 차갑고 권위적인 느낌으로 자주 기억된다. 신학생 시절, 성소는 자발적 응답이라기보다 최종적으로 교회의 선택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불편했고 살짝 저항하는 마음도 생겼었다. 성소의 여정에서 교회의 식별이라는 과정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말이다. 신학교 생활에서, 교회라는 말은 판단하고 규율하는 행위와 관계되는 경우가 참 많았다. 그래서인지, 슬프게도 교회란 말은 부정적인 뉘앙스로 쉽게 다가왔다.

사제가 되어서도 교회라는 말이 그렇게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교회라는 말 자체보다는 교회라는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과 그 말이 사용되는 문맥이 불편했는지도 모르겠다. 복음과 신앙이라는 말보다 교회라는 말을 더 자주 사용하는 사람들은 대개 교회 안에서 권력이 있거나 권위적인 사람들이었다. 교회라는 말이 사랑하고 용서하고 포용하는 문맥에서 사용되기보다는 규정하고 심판하고 배제하는 문맥에서 주로 사용된다. ‘교회적’이라는 형용사를 사용하는 사람들보다 ‘복음적’, ‘신앙적’이라는 형용사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길 희망했다.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과 태도가 교회적인지 또는 교리적인지 묻기보다는, 우리의 말과 행동과 태도가 복음적인지 또는 신앙적인지 묻기를 바랐다. 물론 복음적, 신앙적, 교회적, 교리적이라는 형용사는 긴밀히 연결되어 있고 같은 의미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 우리는 교회로 살아간다

교회에 대한 현대 신학적 설명의 핵심 개념은 ‘하느님 백성’과 ‘친교’다.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으로 구성되며, 교회의 목적과 작동 원리는 친교라는 의미다. 하느님과의 친교, 사람들 사이의 친교를 지향하는 교회는 당연히 하느님 앞에서 평등한 사람들의 공동체다. 물론 가시적 제도로서 교회의 핵심은 교계제도다. 교회법적 관점에서 보면, 가시적 교회의 핵심은 주교직과 성체성사다. 적어도 이승의 하늘 아래서 우리는 제도와 법의 테두리 안에서 살아간다. 제도와 법은 언제나 존중받아야 한다. 하지만 제도와 법은 보이지 않는 더 높은 이상을 지향해야 한다. 교계제도는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 백성과 친교를 위해서 존재한다.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는 언제나 사랑과 평등의 관계다. 교회의 친교는 삼위일체적 친교다. 삼위일체는 성부, 성자, 성령의 서열이 아니라 역할과 관계의 다양성이다. 인간을 향한 주님 사랑의 폭과 깊이를 보여주는 다양성의 신비다.

교회는 종말론적 완성을 향해 가는 순례자다. 교회에 대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핵심 가르침이다. 주님을 향한 여정 속에 교회는 존재한다. 교회는 언제나 ‘되어가는 교회’라는 뜻이다. 우리는 주님을 향한 긴 여정 속에 있다. 그 여정 속에서 우리 자신이 교회가 되어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가 교회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늘 묻고 성찰해야 한다. “감사와 참회가 낡아빠진 문화”가 되어버린 세상에서, “그리하여 내가 사는 곳에 감사와 참회 따위가/ 입에 오르는 일이 사라지고 있”는 세상에서, 교회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뜻해야 하는지 묻고 또 물어야 한다.(백무산의 시 ‘히말라야에서’)

■ 따뜻하고 친밀한 교회

우리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오늘의 세상은 개인의 자유와 자율, 사유와 이성을 강조하는 근대주의 세상에서 감정과 욕망, 공동체적 소속감을 강조하는 탈근대주의 세상으로 변했다. 주체에 대한 관심에서 타자에 대한 관심으로 넘어간다. “내가 사유한다고 믿는 곳에서 타인이 나를 사유하며, 내가 자율적이라고 믿는 곳에서 나는 타율적으로 행동한다.”(미셸 마페졸리 「부족의 시대」) 생각과 이념의 연대보다 감정과 정서의 연대를 더 소중히 여기는, 소속감과 친밀성이 중요한 가치가 된 세상을 살고 있다.

종교사회학적 관점에서 보면, 사람들이 종교 공동체에 소속되는 이유는 세 가지다. 실존적 위로와 위안, 사회적 안전보장, 자기확인과 인정욕망 때문이다. 모든 가치와 이념들이 흔들리는 불안한 세상에서 종교 공동체에 소속되는 것은 심리적 안정을 준다. 치열한 경쟁과 불평등이 강화되는 세상에서 종교 공동체는 사회적 연결망을 제공할 수 있고 종교가 가진 사회적 힘과 영향력은 일종의 사회적 안전장치로 작동할 수 있다. 자신이 가진 능력과 신분과 지위와 재산으로 평가되고 차별받는 세상에서 종교 공동체의 건강한 인정체계는 그래도 숨을 쉴 수 있는 자리를 제공한다.

오늘의 교회는 건강한 소속감과 따뜻한 친밀함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올바른 신앙적 지향을 공유하고 신앙적 실천을 함께 하는 데서 오는 건강한 소속감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교회 안에서 신자들이 서열과 차등의 질서가 아니라 정직하고 평등한 연대에서 오는 진정한 친밀성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공동합의성의 교회란 아마도 이것을 뜻하는 말일 것이다.

■ 슬픔과 기쁨을 함께하는 교회

우리는 이미 교회이지만 교회가 되어가야 한다. 교회가 된다는 것은, 삶의 여정을 주님과 함께 또 사람들과 함께 걸어간다는 것을 뜻한다. 개체적이고 이기적인 시대에 누군가의 곁에서, 누군가와 함께 이승의 삶을 걸어간다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니다. 교회가 된다는 것은 함께 살아가는 것을 훈련하는 일이다.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슬픔과 기쁨을 함께한다는 뜻이다. 타인의 아픔과 슬픔에 공감하고 연대하는 일은 언뜻 보면 쉬워 보인다. 우리의 감정은 타인의 슬픔에는 그래도 쉽게 공감한다. 타인의 아픔과 슬픔을 보고 냉소하고 조롱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물론 이념과 감정의 극한 대립 속에 있는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타자의 아픔과 슬픔에 대해서도 냉소하고 조롱하는 사람들을 자주 발견한다) 슬픔의 공감과 연대가 어디까지 또 얼마만큼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진정성을 확보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함께 슬퍼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아름다운 행위다. 사실, 더 어려운 것은 기쁨을 함께하는 일이다. 타인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공유하기가 무척 어렵다. 삶이라는 인정투쟁의 장에서 시기와 질투의 감정을 극복하는 일은 늘 힘들다. 교회가 된다는 것은 슬픔뿐만 아니라 기쁨마저도 함께하는 일이다.

“그대라는 자연 앞에서/ 내 사랑은 단순해요/ … / 내 사랑에는 파국이 없으니/ 당신은 나의 높이를 가지세요.”(신미나의 시 ‘복숭아가 있는 정물’)

누군가에게 교회가 되어주는 사람은 아마도 이런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우리는 누군가에게 교회가 되어주는 삶을 살고 있는가?

정희완 신부 (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