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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시간을 걷다] (7) 김대건 제작하다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21-04-06 수정일 2021-04-06 발행일 2021-04-11 제 3239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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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입국할 선교사들 인도할 바닷길을 열다
한양에서 4개월가량 머물던 중 바다 통한 입국로 개척 돕기 위해 한성부 서고 지도 바탕으로 제작
황해도와 서·남해 섬들 상세히 표시
지리정보 뿐 아니라 사목여정 담아

최근 일본 고등학교 교과서에 독도가 ‘일본 고유의 영토’라는 내용을 담는 것으로 결정되면서 독도를 둘러싼 역사 왜곡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독도에 관한 역사 왜곡이 등장하면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의 이름이 오르내리곤 한다. 김대건이 독도에 관한 일본의 왜곡된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증거, 바로 ‘조선전도’를 1845년 제작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김대건이 ‘조선전도’를 제작한 시간을 함께 걸어 본다.

김대건의 ‘조선전도’. 서양에 소개된 조선의 첫 지도는 아니지만, 정확도가 뛰어나고 조선의 지명을 우리말 발음대로 표기한 최초의 지도로, 서해와 남해의 섬들이 상세하게 묘사돼 있다. 독도(우산)를 명확하게 표기한 것도 눈길을 끈다.

■ 부제 김대건이 남긴 지도

“신부님께 조선 종이 20장이 들어 있는 봉투, 조선 그림 석 장이 들어 있는 작은 봉투, 병풍이라고 하는 여덟 폭으로 된 그림, 밤에 사용하는 놋그릇(요강), 신부님들의 유해가 들어 있는 누런 주머니 세 개, 조선지도, 빗 세 개와 빗을 소제하는 기구, 붓을 쓸 때 붓끝만 풀어서 쓰는 붓 네 자루, 돗자리 하나를 보내 드립니다.”

부제품을 받은 김대건은 조선 입국에 성공하고 한양에서 선교를 위한 준비를 하면서 1845년 4월 7일 스승 리브와 신부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에는 여러 물품들과 함께 김대건이 제작한 ‘조선전도’가 담겨 있었다.

부제 김대건이 한양에 체류한 기간은 약 4개월가량. 그나마도 3개월가량을 병으로 앓아 누워 있었기에 실제로 움직이며 활동할 수 있었던 기간은 1개월 정도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한양 돌우물골(오늘날의 서울 소공동 부근)에 선교 거점이 될 집을 매입해 머물면서, 라틴어로 된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고, 14살 소년 둘을 선발해 가르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조선전도’도 그렸다. 도무지 한 나라의 지도를 제작하기에는 부족해 보이는 시간이다.

이에 김대건은 이미 제작된 지도들을 참고하기로 했다. 샤를르 달레 신부가 쓴 「한국 천주교회사」에 따르면 김대건은 서울 한성부(漢城府) 서고의 지도를 참조했다고 한다. 조선이 사용하던 공식지도를 바탕으로 지도를 제작한 것이다.

물론 이 일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오늘날과 같은 복제기술이 있다면 삽시간에 지도를 옮길 수 있었겠지만, 김대건이 지도를 옮기기 위해서는 손으로 그리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관직이나 벼슬이 없는 김대건은 한성부서관 출입이 불가능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참고할 지도를 구하기 위한 과정에도 상당한 어려움이 따랐을 것으로 예상해 볼 수 있다.

이런 시간ㆍ환경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김대건은 지도를 완성시켰다. 심지어 김대건이 제작한 지도는 1부가 아니었다. 김대건이 체포된 후 감옥에서 쓴 편지에 따르면, 김대건은 체포되기 전에 중국어선을 통해 중국 상하이의 선교사들에게 지도 2부를 보냈다.

1978년 김대건의 ‘조선전도’를 발견해 연구한 고(故) 최석우 몬시뇰은 “지리학적인 면에서 봤을 때 김대건의 지도는 해박한 지리 지식 없이는 작도가 불가능한 것”이라며 ‘조선전도’ 자체가 “김대건 신부의 지리 지식을 입증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 조선의 지리를 세계에 알리다

김대건의 ‘조선전도’는 서양에 소개된 조선의 첫 지도는 아니다. 1735년 당빌(D’anville)의 ‘조선왕국전도’와 1840년 시볼트(Siebold)의 ‘조선반도도’가 공개된 바 있다. 그러나 이들 지도는 중국지도를 바탕으로 작성된 지도로 정확도가 낮았다. 반면 1855년 파리국립도서관에 입수된 김대건의 ‘조선전도’는 입수된 그 해에 프랑스 지리학회지에 소개되고, 프랑스 지리학사전에도 오르는 등 조선의 정확한 지도로 평가받았다. ‘조선전도’가 소개된 지리학회지는 4개 국어로 번역돼 유럽 전역에 전해지기도 했다.

김대건의 ‘조선전도’는 조선의 지명을 우리말 발음 그대로 표기한 최초의 지도다. 김대건은 ‘조선전도’에 전국의 주요 관부와 병영 266곳, 만주 봉황성에서 의주까지 들어오는 도로, 남해안 해로 등을 기록하면서, 지명을 우리말 발음 그대로 옮겨 로마자로 표기했다. ‘조선전도’ 이전에 서양에 소개된 조선지도들은 우리 지명의 한자를 중국어로 읽은 발음을 표기해 왔다.

특히 독도가 그려진 점은 주목할 만하다. 당시 독도는 우산(于山)이라 불렸는데, ‘조선전도’에는 동해에 두 개의 섬, 울릉도(Oulengto)와 우산(Ousan)이 명확하게 표기돼 있다. 김대건이 선교사들의 입국에 불필요한 산이나 강 이름을 뺐던 점을 생각하면 입국로와 크게 관계없는 동쪽의 작은 섬을 그려 넣고 굳이 이름까지 적은 것은 이 섬이 의심의 여지없이 조선 땅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셈이다. 이후 여러 지리학자들이 조선지도에서 독도를 ‘Ousan’이라고 표기해 왔다.

2020년 추가 발견된 ‘조선전도’ 사본에는 라틴어로 동해(MARE ORIENTALE)라고 적혀 있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원작자가 ‘김대건 신부’라고 명기된 이 사본은 1868년 3월 미 해군 장교 J. R. 펠란이 모사한 지도다. 이 사본은 19세기부터 ‘일본해’ 표현이 국제적으로 정착됐다는 일본의 주장에 반하는 증거가 된다.

■ 사목을 위한 지도 ‘조선전도’

“이들 편지에 황해도 해안의 섬과 바위와 그밖에 주의해야 할 것들에 대한 설명과 함께 조선지도 두 장을 동봉했습니다.”

김대건의 ‘조선전도’는 무엇보다 사목을 위한 지도였다. 김대건이 1846년 8월 26일 감옥에서 페레올 주교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 사실을 명확히 알 수 있다. 김대건은 지도와 함께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해로를 통해 입국할 때 가장 많은 참고가 될 황해도 해안의 섬과 바위를, 그리고 입국 시에 주의해야 할 점들을 덧붙였다. 지도에는 황해도뿐 아니라 서해와 남해의 섬들이 상세하게 표시돼 있다. 조선 조정의 감시가 심해져 육로를 통한 입국이 어려워짐에 따라 해로를 통한 입국로를 개척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랐던 것이다.

또한 윤지충(바오로)의 고향 진산 등 교회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장소들을 표기했고, 김대건이 답사했던 금강 일대와 김대건이 체포된 서해안 일대가 상세하게 묘사돼 있다. 이 지도는 단순히 지리정보만 담은 것이 아니라 사제 김대건의 사목여정이 드러나는 사목지도인 것이다.

2019년 내포교회사연구소 제4회 연구발표회에서 이용호 신부(솔뫼성지 전담)는 김대건이 지도를 제작한 이유에 관해 “여기에는 당시 조선 봉건사회의 권력 투쟁 속에 신음하는 백성들에 대한 사랑과 연민이 저변에 자리하고 있었다”며 “우리는 김대건 신부의 조선전도를 통해서 그분의 남달랐던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영성을 살펴볼 수 있다”고 밝혔다.

◆ 김대건의 시간을 함께 걸을 수 있는 곳–백령도성당

백령도는 김대건이 선교사들의 입국로를 개척하기 위해 방문한 곳으로, 김대건은 이곳에서 중국선원들을 통해 편지와 조선전도를 선교사들에게 발송했다. 이후 13명의 선교사가 백령도를 경유해 입국했고, 백령도와 인연이 있는 사제 중 7명이 103위 성인에 포함됐다. 이에 백령도성당은 인천교구 순교신심순례지로 선포됐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