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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희 대주교 선종] 삶과 신앙

방준식 기자
입력일 2021-03-16 수정일 2021-03-16 발행일 2021-03-21 제 3236호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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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구 성장 크게 일구며 하느님 사랑 전한 따뜻한 목자

2015년 9월 14일 대구 주교좌계산성당에서 봉헌된 금경축(사제 수품 50주년) 감사미사에서 이문희 대주교(오른쪽)가 축사를 들은 후 답사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역대 최연소 주교로, 대구대교구 제8대 교구장을 지낸 이문희(바울로) 대주교가 3월 14일 노환으로 선종했다. 이 대주교는 은퇴 후 암 투병을 하면서도 봉사활동을 활발히 펼치며 하느님 사랑을 전한, ‘마음이 따뜻한 참 목자’였다.

재임 기간 동안에는 교구민 복음화에 전력을 다하며, 교세를 대폭 확장해 교구 성장 견인차 역할을 했던 이문희 대주교. 특히 주교 수품 50주년을 불과 한 해 앞둔 시점이었다는 사실에 그의 선종 소식이 더욱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 정치인을 꿈꾸다 사제의 길로

이문희 대주교는 1935년 9월 14일 대구 중구 남산동에서 한솔 이효상(아길로, 1906~1989)씨의 4남매 중 차남으로 출생했다. 유력 정치인인 아버지 이효상씨는 천주교회보(현 가톨릭신문) 창간호 청년 편집위원이었으며 많은 기사를 기고한 대표 필진이기도 했다.

이 대주교는 1954년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북대학교 정치학과에 입학, 대학 시절부터 사제의 길을 가기로 결심한다. 정치인을 꿈꾸던 그가 사제의 길을 가게 된 계기는 1986년 가톨릭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그가 말했듯 “정치나 경제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정신세계를 풍요롭게 하는 신부가 되려는 사람은 드문 것 같아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었다. 자서전 「저녁 노을에 햇빛이」에 따르면 그는 대학교 2학년 때 아버지에게 신학교에 진학하겠다고 편지로 알렸고, 아버지는 흔쾌히 이를 받아들였다고 전해진다.

■ 주교 임명, 젊은 나이에 짊어진 큰 십자가

프랑스 유학길에 올라 1962년 프랑스 리옹 신학대학 철학과를 졸업했고 1965년 12월 23일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이후 1966년 7월 귀국해 대구 동촌본당 임시 주임, 청주교구청, 군종신부, 가톨릭 액션 협의회 담당사제를 거쳐 대구대교구청에서 근무하던 그는 사제품을 받은 지 7년째 되던 1972년 9월 19일 당시 38세라는 젊은 나이에 무거운 십자가를 졌다. 대구대교구장 서정길 대주교의 보좌주교로 임명된 것이다. 이후 14년간 교구장을 보필하면서 열정적인 추진력으로 대구대교구 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1979년 대구가톨릭대학교병원 개원, 1982년 선목신학대학(현 대구가톨릭대학교) 개교, 신나무골성지와 한티순교성지 개발 등을 성사시켰다.

서정길 대주교가 만 75세 정년 규정에 따라 교구장직에서 은퇴하면서 이문희 대주교가 1986년 7월 5일 교구장직을 승계, 대구대교구 제8대 교구장에 착좌했다. 교구장의 75세 정년이 권고됐던 새 교회법에 따라 교구장 재임 중에 이임과 승계가 이뤄진 것으로, 이는 한국교회 최초의 역사적인 일이었다.

1987년 6월 29일 로마에서 이문희 대주교(오른쪽)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으로부터 팔리움을 받고 있다.

■ 교구 성장과 쇄신 이끌며 세상과 소통

교구장 착좌 직후 순교자 현양에 앞장선 이 대주교는 1987년 수원교구 미리내 무명 순교자 묘에서 발굴된 이윤일 요한 성인 유해를 관덕정순교기념관에 봉안하고 교구 제2주보 성인으로 선포했다.

1997년 ‘함께 가자, 생명의 길로’를 주제로 열린 교구 1차 시노드를 통해서는 교구를 현재의 5대리구 체제로 전환하고, 새로운 시대에 부응하며 쇄신된 교회로 거듭나는 토대를 마련했다. 또 이 대주교 재임 기간(21년) 동안 교구 본당 수는 79개에서 147개로, 신자 수도 20만 명에서 41만 명으로 증가하는 등 교세는 배로 확장됐다.

서정길 대주교가 힘써온 교구 사회복지 체계를 확립한 것도 그였다. 1991년 4월 교구청 내 구 효성여고 자리에 ‘천주교 대구대교구 가톨릭사회복지회’를 창립했다. 복지사업을 통괄 조정할 수 있는 전담기구가 처음으로 설치된 것이다.

청소년 사목에도 각별한 관심을 둬 2000년 대희년을 맞아 전국청소년대회, 주일학교 초등학생대회와 중·고등학생대회를 개최했다. 참가 학생들이 공동체와 함께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을 닮은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 1994∼2000년 교황청립 로마 한인신학원 초대 총재를 지냈으며, 중국 선교에도 열정을 쏟았다.

한·일간 화해와 용서를 추구한 것도 빼놓을 수 없다. 한·일주교단 교류모임을 1996년부터 모두 12차례 열어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모색하고 양국 교회 간 일치와 화해에 이바지했다. 또 (사)한국여기회 총재를 맡아 일본의 작가이자 가톨릭 신자로 인간애 넘치는 작품을 선보였던 고(故) 나가이 다카시 박사의 삶을 알리고 ‘남을 자기같이 사랑하라’는 여기애인(如己愛人)의 삶을 전하는 활동을 펼쳤다.

학술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온 이 대주교는 한국떼이야르 연구회를 이끌면서 과학과 종교가 융화된 독창적인 그리스도론을 제시한 떼이야르 신부의 사상을 연구했다. 2013년에는 대구 남구에 ‘앞산 밑 북카페’를 열어 연구회 활동을 대중 문화공간으로 확장시키기도 했다.

■ 고통 중에도 끊임없이 실천한 사랑

건강상 이유로 21년 만에 교구장 직을 은퇴한 이 대주교는 2008년 식도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아야 했다. 물조차 삼키지 못하는 고통 속에서도 그는 “예수님의 계명인 사랑을 새삼 느꼈다”고 회고했다. 그는 하느님 사랑을 전하겠다는 일념으로, 죽음 앞에 놓인 사람들을 간호하는 호스피스 교육을 몸소 받고 봉사활동에 나섰다. 당시 교구장까지 역임한 성직자가 호스피스 활동을 하는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어서 크게 회자되기도 했다.

이 대주교는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라는 자신의 사목표어처럼 주님의 뜻을 올곧이 이루기 위해 한평생을 바쳐온 참 목자였다. 재임 중 친교와 믿음의 공동체, 사제와 신자들이 함께 호흡하며 지역사회 복음화에 앞장설 수 있는 방안을 제시했다. 또 성소의 질적인 배양과 사제 간의 단합과 신자들과의 친교 등 참신하고 갚진 행적을 남겼다.

우리는 교구 쇄신과 복음화에 전념을 다하고 병마와 싸우면서도 남을 위한 봉사에 매진했던 충실한 목자를 잃게 됐다. 그가 세상에 남긴 몫은 이제 우리 모든 신앙인들에게 남아있다.

◆ 고(故) 이문희(바울로) 대주교 약력

▲1935년 9월 14일 출생(대구시 중구 남산동 619번지)

▲1954년 3월 4일 경북고등학교 졸업

▲1959년 3월 25일 경북대학교 법정대학 정치학과 졸업

▲1962년 6월 29일 프랑스 리옹 신학대학 철학과 졸업

▲1965년 12월 23일 사제 수품(France St. Sulpice 성당, Blanchet 대주교 주례)

▲1966년 6월 23일 프랑스 파리 가톨릭대학교 신학부 졸업

▲1966년 7월 20일 ~ 1966년 12월 30일 대구 동촌본당 주임(임시)

▲1966년 12월 23일 ~ 1967년 12월 29일 청주교구청 근무

▲1967년 12월 30일 ~ 1969년 1월 29일 가톨릭 액션 협의회 담당사제

▲1969년 4월 4일 ~ 1972년 4월 30일 군종신부(공군)

▲1972년 6월 17일 ~ 1972년 10월 6일 대구대교구청 근무

▲1972년 9월 19일 대구대교구 보좌 주교 임명(포르코니움 명의 주교)

▲1972년 10월 7일 대구대교구 보좌 주교로 임명 통보

▲1972년 11월 30일 주교 수품, 대구대교구 총대리

▲1977년 7월 8일 ~ 1978년 5월 2일 대구 주교좌계산본당 주임(겸)

▲1979년 7월 1일 ~ 1980년 9월 19일 가톨릭 병원장(겸)

▲1981년 12월 26일 ~ 1986년 8월 5일 학교법인 선목학원 이사장

▲1985년 1월 5일 대구대교구 부교구장 대주교 승품

▲1986년 2월 15일 ~ 2000년 11월 17일 사회복지법인 대구가톨릭사회복지회 이사장

▲1986년 7월 5일 대구대교구 대주교좌 계승, 교구장 취임

▲1987년 11월 ~ 1993년 10월 주교회의 부의장

▲1990년 8월 3일 ~ 1991년 12월 30일 학교법인 선목학원 이사장

▲1995년 3월 1일 ~ 2001년 3월 21일 학교법인 선목학원 이사장

▲1993년 10월 15일 ~ 1996년 10월 17일 주교회의 의장

▲1994년 10월 ~ 2000년 9월 로마 한인신학원 총재

▲1996년 11월 14일 ~ 1999년 10월 13일 주교회의 성직주교위원회 위원장

▲1999년 10월 14일 ~ 2004년 10월 14일 주교회의 교육위원회 위원장

▲2005년 10월 ~ 2007년 3월 29일 주교회의 성직주교위원회 위원장

▲2007년 3월 29일 대구대교구장 사임

▲2007년 4월 24일 은퇴

▲2021년 3월 14일 선종

방준식 기자 bjs@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