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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알 하나] 십자가의 용도 / 양하영 신부

양하영 신부 (제1대리구 남양본당 주임)
입력일 2021-01-12 수정일 2021-01-12 발행일 2021-01-17 제 3228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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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십자가 지고 사느라 힘들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 십자가는 본당에서 맡은 어떤 직책, 가족, 귀찮고 어려운 일을 맡았을 때 등 다양하다. 그렇게 우리는 많은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데, 이 부담스러운 십자가를 거부하고 내팽개쳐야 할까? 후딱 끝내버려야 할까? 십자가라 칭하는 것들 앞에서 어려운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선택의 기로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보다는 십자가의 용도가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해보게 된다.

예수님께서 잡히셔서 수난 당하실 때 모습을 보면, 끔찍하다. 수많은 채찍질에 온몸의 살점이 뜯겨 나간다. 뜯겨 나간 상처에는 피와 땀이 범벅이 되어 흐르고 벌어진 상처에 계속된 채찍질로 고통에 고통이 쌓인다. 고문이 끝난 뒤 예수님께 크디 큰 십자가가 주어진다. 예수님은 당신 몸보다 큰 십자가를 지고 길을 걸으신다. 고문 중 채찍질로 예수님의 온몸이 찢겼음에도 십자가 지고 걷는 순간까지 채찍질이 계속된다.

하지만 맨몸으로 채찍질 당할 때와는 다르다. 채찍질은 어떤 채찍일지라도 위에서 아래로 내려쳐야 하는 원리가 있다. 아래에서 위로 올려 친다면 채찍 끝이 채찍을 쥔 사람에게 날아올 수 있기에, 위에서 아래로 내려친다. 채찍이 위에서 내려치는 상황에서 채찍 끝이 내리꽂힐 예수님 등 위에는 무엇이 있는가? 십자가가 있다. 넓고 큰 십자가 아래의 예수님께 제대로 꽂힐 채찍질은 얼마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모욕하며 던졌던 돌들도 십자가에 맞고 튕겨 나가는 것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크고 무거워 버겁게만 보였던 십자가가 예수님을 채찍질과 돌팔매질로부터 보호해준다.

십자가에 대한 의미는 신학적으로 다양하다. 하지만 인간적인 관점과 개인적인 관점에서 십자가의 용도라 표현하며, 그 용도는 ‘보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수많은 채찍질과 돌팔매질을 막아주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살아가면서 채찍질과 돌팔매질 같은 고통이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억울하고 괴로운 시간일 것이고 포기하고 싶고 지치는 시간일 것이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고통의 시간 속에서 십자가라 불렀던 자식을 생각하며 다시 일어서는 모습을 종종 본다. 십자가라 불렀던 어려운 일들이 오히려 나를 보호해주며 성장의 길로 이끌기도 한다.

십자가는 우리의 삶 속에서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보호하고 일어서게 해주는 든든한 하느님의 선물이다. 이런 은총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채찍질과 돌팔매질과 같은 고통 중에 십자가를 버릴까? 빨리 끝내버릴까? 선택의 고민보다는, 십자가가 나를 어떻게 보호하고 있는가, 어떤 모습으로 일으켜주고 성장시킬까 찾아보게 된다. 그리고 나에게 지워진 십자가가 무거워 하느님께 투덜대면서도 십자가로 나 잘 지켜주시고 넘어지면 꼭 일으켜달라고 응석 부려본다. 하느님께 응석을 부리며 십자가를 꿋꿋이 지고 채찍질과 돌팔매질 길을 뚫고 지나가 본다.

양하영 신부 (제1대리구 남양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