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화 그늘에서 고통받던 노동자들의 피난처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무너진 기본권 교회가 노동문제에 목소리 내기 시작 이주민 자립 위한 물질·정신적 지원과 이주노동자 보호법 제·개정 위한 활동 한국 노동사목의 선구자 도요안 신부 인권과 노동 존엄성 다루는 일에 헌신 노동자과 이주민 권리 수호 위해 힘써
■ 우리들의 스승, 도요안 신부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가톨릭교회는 한국의 노동 현실을 직시하고 일하는 사람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데 함께 노력해 왔다. 노동사목 활동에 많은 사람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도요안 신부는 이 모든 활동에 중심적 역할을 한 분이다. 도 신부는 2010년 11월 22일 선종할 때까지 이 땅의 노동자들, 이주민들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고 앞장서서 이들의 권리를 지켜내기 위해 애썼다. 노동사목위원회 전신인 도시산업사목연구회 초대 위원장을 맡았으며, 1983년에 노동사목위원회 3대 위원장직을 맡아 수행했다. 이주사목위원회 활동의 모태가 된 외국인노동자상담소가 1992년 개소할 때 담당신부를 맡아 이주민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이들이 건강한 사회의 일원이 되도록 노력했다. 도요안 신부는 1937년 3월 2일 미국 뉴저지주에서 태어나, 뉴저지주 돈보스코 신학대학을 졸업한 후 1959년 한국에 입국해 3년 동안 광주 살레시오고등학교에서 영어와 라틴어 교사로 재직했다. 그 뒤 이탈리아와 프랑스 신학대학에서 공부했고, 1967년 프랑스 리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1968년 서울 도림동성당에서 보좌신부로 사목을 시작한 이래 한국이 고향이 됐고 이후 가난한 사람, 일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삶을 이어왔다. 서울대교구 가톨릭노동장년회 지도신부(1972∼1979), 가톨릭노동청년회 전국지도신부(1983∼1985), 노동사목위원회 위원장(1982∼1999), 노동사목회관 관장(1999∼2002), 서울대교구 이주사목 담당신부(2002∼2010) 등 일생 대부분을 인간 권리와 노동 존엄성을 다루는 일에 헌신했고, 노동자들의 피난처와 방패 역할을 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도 신부는 자애로웠고, 유머가 넘쳤으며 말년의 모습에는 이웃집 할아버지와 같은 포근함이 있었다. 와인과 요리에 대해서도 해박했고 전문가적 식견을 보여 줬다. 그러나 생활은 엄격했고 방은 정갈했으며 저술 활동을 위한 자료와 신문 스크랩북이 항상 책상에 놓여 있었다. 도 신부의 글은 논리적이고 각주와 참고문헌은 그분의 독서량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풍부했다. 늘 사회문제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보여 줬지만, 글과 말은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았으며 합리적이고 실천적이었다. 거듭되는 암수술과 신장 투석을 힘겨워 하면서도 한국의 노동 현실, 이주노동 문제, 다문화가정 문제에 대해 지속해서 의견을 개진하는 등 좀 더 나은 세상을 이뤄 나가는 데 당신의 역할을 끝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 노동의 현실은 도전의 연속 우리나라 국내 총생산 규모는 세계 10위권 안팎이고 전반적인 삶은 풍요로워지고 있지만, 노동시장 이중구조의 심화, 소득 불평등, 장시간 노동, 청년실업, 플랫폼 노동자들이 처한 근로환경,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의 삶은 선진국에 진입해 있는 우리의 또 다른 모습들이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팬데믹은 이러한 현실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 우리 사회가 직면한 부조리와 불평등을 해소하고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는 것은 우리 모두의 소명이다.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와 이주사목위원회는 시대적 소명에 부응해 앞으로도 실천적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다.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이주사목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