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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마당] 성 엘리사벳

최한울(마리아ㆍ대구 지묘본당)
입력일 2020-11-10 수정일 2020-11-10 발행일 2020-11-15 제 3219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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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부터 서울시여성가족재단은 매년 성평등 주간(9월 1~7일)을 기념해 시민이 직접 꼽은 일상에서 흔히 겪는 성차별 언어를 공개하고 이를 전문가 자문에 따라 현시대에 맞는 표현으로 바꿔 부르기를 제안하고 있다. 지금까지 시민 공모로 선정된 성차별 언어에는 우리가 습관적으로 쓰던 남성 중심의 표현이 많이 있다. 그 중, 여교사, 여군, 여의사와 같이 직업 앞에 ‘여-‘를 붙이는 표현 방식은 가장 많은 교체 제안을 받은 것 중에 하나다.

10월에서 11월로 넘어가던 날, 우리 본당 달력을 넘기다가 나의 시선은 11월 17일에 멈췄다.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내 눈은 11월의 다른 칸들을 바쁘게 쫓으며 남자 성인들의 이름을 빠르게 훑어갔다. 당연히 ‘성남’은 없었다. 남자 성인들의 이름 앞엔 짧게 ‘성’이 붙었다.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나는 103위 한국 성인 호칭 기도에도 여자 성인들은 성녀로 호명되는 것을 일순간 기억했다.

나는 ‘성녀’라는 명칭 사용에 대한 언어적 그리고 종교적 정당성을 찾고 싶다. 교회의 언어인 라틴어는 언어 자체가 단어를 남성, 여성, 중성으로 구분하는 문법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의 성별 그리고 지칭 혹은 호칭의 의미에 따라 사용되는 표현이 달라진다 (남성 성인은 Sanctus [지칭] 혹은 Sancte [호칭], 여성 성인은 지칭과 호칭 모두 Sancta). 라틴어는 격에 따라 단어의 변형이 한번 더 일어나지만 그것은 여기서 논외로 한다. 한국어는 라틴어와 같은 문법성(性) 을 가지고 있지 않다. 설령 라틴어의 의미를 살리기위한 궁여책으로 그렇게 번역을 했다고 하더라도 남자 성인의 이름에 붙는 ‘성’은 라틴어의 Sanctus 혹은 Sancte 처럼 남성을 뜻하기보다는 중성의 의미가 있을 뿐이다. 누군가는 성인의 남녀구분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여자 성인을 따로 ‘성녀’로 표현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럼 왜 남자 성인도 공평하게 ‘성남’으로 표현해서 더 직관적이고 쉽게 남녀구분을 하지는 않은 것일까? 이는 ‘성녀’가 남녀구분을 위해 나온 배려의 표현이 아니라 남성 중심 사고방식에 기인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오랜 시간 사용해온 표현이기 때문에 나름의 ‘전통성’을 내세우며 ‘성녀’ 사용을 유지하자고 말한다. 나는 ‘성녀’라는 표현 속에 가톨릭의 만인 평등, 인간 존엄의 정신이 어떻게 반영되어있는지 되묻고 싶다. 언어사용은 우리의 생각과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는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 가톨릭 교회가 포괄적인 의미의 ‘성’ 혹은 ‘성인’을 남녀 성인 모두에게 사용했으면 좋겠다. ‘성녀’표현에 대한 나의 생각을 트집쓰기로 치부하는 사람들은 천주교 평등 사상을 금하며 박해했던 조선 후기의 조정과 뭐가 다를까.

현 가톨릭 내에서 성평등과 여성인권 신장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일전에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교회는 시대적 흐름에 귀 기울여야 함을 말씀하시며 더 큰 정의와 평등을 찾는 여성들의 요구에 경청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였다 (출처: 2019년 4월 2일 교황 권고문). ‘성녀’는 어쩌면 한국 가톨릭 교회안에 스며든 한국의 남성 중심 언어이데올로기의 단면일지도 모른다. 교회가 부르짖고 시대가 요구하는 양성평등을 향한 변화의 물결에 한국 가톨릭 공동체가 좀 더 적극적인 행동력을 보여줬으면 좋겠다. 조만간 본당 달력과 매일미사 책자에서 ‘성녀 엘리사벳’이 아닌 ‘성 엘리사벳’을 만나고 싶다.

최한울(마리아ㆍ대구 지묘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