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말씀묵상] ‘용서’와 ‘교정’의 차이

임숙희(레지나) 엔아르케성경삶연구소 소장
입력일 2020-09-01 수정일 2020-09-02 발행일 2020-09-06 제 3210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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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3주일
제1독서 (에제 33,7-9) 제2독서 (로마 13,8-10) 복음 (마태 18,15-20)
공동체 삶과 불일치 하는 행실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공적으로 단죄하기보다 형제적 사랑으로 타일러야
사랑에 바탕을 둔 교정은 스스로 공동체로 돌아오게 해
하느님 뜻에 따른 형제적 교정에 대한 교회 책임 막중

“아, 사람들로 붐비던 도성이 외로이 앉아 있다.”(애가 1,1) 코로나 제2차 대유행 시작이라는 뉴스를 들으면서 걱정스런 마음으로 연중 제23주일 말씀을 묵상합니다. 불가피하게 공동체와도 거리를 둔 시기에 모든 말씀의 주제가 공동체의 형제애적 교정이라 감사드립니다. 실천하기 쉽지 않은 주제입니다.

약 40년 전, 1982년 독일 성경학자 게르하르트 로핑크는 그의 저서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에서 이렇게 질문합니다. 초대 교회에서 상호 충고가 교회 공동체 건설의 토대이자 신자 생활의 중요한 요소였는데 “오늘날 공동체에서 무슨 형제적 충고라고 할 만한 것이 아직도 이뤄지고 있기는 한가? 그렇지 못하다면 그 까닭은 무엇인가? 그 까닭은 하느님 앞에서 서로 소속된, 서로 책임 있는, 공통된 구원과 불행의 역사를 가진 공동체라는 의식이 아예 사라지고 말았기 때문은 아닐까?”

■ 복음의 맥락

오늘 복음은 마태오의 다섯 설교에서 네 번째 ‘공동체 설교’(마태 18,1-35)에 해당합니다. 마태오는 이 본문에서 위기에 빠진 형제들을 되찾는 규칙을 제공합니다. 당시 로마 제국은 부와 권력을 중시했고 작은 이들, 약한 이들에게는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율법 준수를 강조하는 회당에서도 그럴 여건과 능력이 없던 작은 이들은 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마태오는 공동체 신자들 일부가 당시 이런 사회의 기준을 공동체 안으로 들여오면서 작은 이들을 환대하고 격려하던 예수님에 대한 기억을 상실할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을 봤습니다. 지혜롭고 식별 있는 사목자, 교회 조직과 활동에 관심을 가졌던 마태오는 공동체 설교 한가운데에서 교회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사목적 방법으로 예수님이 가르치는 ‘형제애적 교정’과 ‘공동체기도’를 소개합니다.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은 악한 사람에게 말하지 않으면 죽음을 대가로 치를 것이라고 선포하는데 이는 복음 묵상에 빛을 비춰 줍니다.

제임스 티소의 ‘내 이름으로 모인 두세 명’.(1886-1894년)

■ 형제애적 교정과 공동체 기도

“네 형제가 너희에게 죄를 지으면?” 어떻게 할까요? 외면할까요? 소외시킬까요? 뒷담화를 하며 비난만 할까요? 여기서 ‘죄’는 한 사람에 대한 개인적인 모욕이 아니라 공동체 삶과 일치하지 않는 행실을 한 경우입니다.

모욕은 용서하지만 죄는 교정해야 합니다. 용서할 상황과 교정할 상황을 섬세하게 식별하는 것이 형제적 교정의 첫 단계입니다. 잘못한 형제(이하 자매도 포함되는 개념으로 사용)를 그냥 용서하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화해한다면 정말 그 형제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과거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죄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하는 심각한 죄와 관련된 것 같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런 죄들을 성령을 거스르는 행위, 육의 행실이라고 규정합니다.(갈라 5,19-21)

먼저 누가 공동체 삶과 일치하지 않은 행실을 한다면 그를 공동체 앞에서 공적으로 단죄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고 싶은 유혹이 크겠지만 먼저 단 둘이 만나 그가 한 행동의 동기를 알아봐야 합니다. 이 순간은 그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돼야 할 모습을 보는 사랑의 시선을 품은 만남입니다. 마음속에 미움, 복수, 분노를 품고 만난다면 타이름은 분노의 투사가 되고 오히려 그 형제, 자매를 영영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이런 단계의 사랑에 이르려면 인내와 기도 안에서 성령이 주시는 힘과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런 사랑에 바탕을 두고 주님의 자비와 온유함에 힘입어서 형제애적 교정을 실천한 본보기는 사도 바오로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로마 13,8) 이런 교정은 화해와 다릅니다. 관계가 악화되거나 멀어질 수도 있지만 주님의 자비 안에서 한 교정은 언젠가 그 형제가 스스로 공동체에 돌아오게 할 것입니다.

이렇게 온 마음을 다해 노력했는데도 결과를 얻지 못하면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라고 가르치십니다. 이것은 재판에서 두세 사람을 증인으로 채택하는 규칙(신명 19,15)을 떠올리게 하는데, 마태오 공동체가 유다교 공동체와 많은 차이가 없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교회에 알려서도 듣지 않는다면 이민족이나 세리처럼 대하라고 합니다. 공동체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처럼 대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소외나 판단이 아니라 가슴이 아프지만 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극단적인 처방입니다. 그는 공동체에서 분리돼 자신을 동반하고 염려했던 공동체의 선익이 얼마나 큰 것인지, 자신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를 제대로 볼 것입니다.

여기에서 마태오는 그리스도가 베드로에게 맡긴 매고 푸는 권한을 교회에까지 확장시킵니다.(마태 18,18-20) 교회는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가는 착한 목자의 표징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잃어버린 형제와 자매의 회개와 귀향의 은총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합니다. 또한 교회는 기도 안에서 인간적 방식이 아니라 하느님 뜻에 따른 형제적 교정에 대한 자신의 책임이 얼마나 중요한지 느끼게 되고, 시대와 문화 안에서 예수님의 형제애적 교정을 실천하는 식별력과 용기, 힘도 얻을 것입니다.

■ 잃어버린 양이자 착한 목자

세상 안에서 살면서 유혹이 얼마나 강한지,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체험하는 우리는 예수님이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 목장으로 데려오는 일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압니다. 우리 자신이 예수님의 잃어버린 양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우리가 오늘날 길을 잃어버리고 오류에 빠진 형제와 자매에게 착한 목자가 돼 줄 수도 있습니다.

■ 하느님의 힘과 우리의 노력으로!

다시는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코로나19 시기에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이 우울, 고독, 질병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경제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마태오 공동체에서 실천했던 것처럼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고 형제, 자매의 삶과 죽음의 선택이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책임 의식을 갖는 신자들과 세상의 고통을 품에 안는 교회 공동체의 형제애와 중재 기도는 오늘날 세상이 교회에 기대하는 연대와 희망, 세상을 비추는 빛의 표지가 될 것입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는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 정녕 나는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리라.”(이사 43,19)

임숙희(레지나) 엔아르케성경삶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