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동안 중국의 쓰촨성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성 앵베르 주교는 1836년 조선대목구의 보좌주교로 임명됐다. 보좌주교가 된 이듬해 브뤼기에르 주교가 선종하자 성인은 제2대 교구장으로 임명됐고, 그해 12월 정하상(바오로) 성인 등 조선 신자들의 도움으로 조선 입국에 성공했다.
성인은 3개월이란 짧은 시간에 고해성사가 가능할 정도로 우리말을 익히고, 이미 입국해 활동하고 있던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와 함께 본격적인 사목활동을 펼쳤다. 박해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성인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왕성한 활동을 전개했다. 죽을 위험에 놓인 어린이들을 위해 세례를 주는 운동을 펼치기도 하고, 서울뿐 아니라 지방을 순회하면서 성사를 집전했다. 이런 성인들의 노력으로 신자들이 빠르게 증가해 신자 수가 9000명을 넘었다.
또 방인 사제 양성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성인들은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 3명을 신학생으로 선발해 마카오로 유학을 보내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최방제 신학생은 병사했지만,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와 하느님의 종 최양업(토마스) 신부는 우리나라의 첫 사제들로서 고국으로 돌아와 신자들을 돌볼 수 있었다. 성인들이 뿌린 씨앗 덕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