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주말 편지] 피정 / 김계남

김계남(아녜스)수필가
입력일 2019-10-29 수정일 2019-10-29 발행일 2019-11-03 제 3168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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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삶을 영위하려면 육신의 때를 씻어 내는 일도 중요하지만 마음의 때를 벗기는 일은 더욱 중요합니다. 지난해에 얻은 심신의 과부하가 아직도 남아 꽃들 피어 속삭여도 합창하지 못하고 아픈데 마침 글을 쓰며 신앙을 공유한 지인들과 찌든 일상들을 훌훌 털어버리고 피정의 길을 떠났습니다.

경기도 의왕의 나자로 마을에는 말씀의 집이 있고 영혼의 쉼터가 곳곳에 있는데 오늘은 그곳에서 유명한 이태리어과 교수님의 특강이 있었습니다. 단테의 웅숭깊은 신앙의 노래, 「신곡」(神曲)은 잠시 흐트러진 나의 삶을 되돌아보게 했고 유창한 이태리어로 낭송되는 단테의 시 한 구절은 감미롭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 단테는 불후의 「신곡」을 만들어 냈는데 그 줄거리는 이러합니다.

단테가 숲속에서 짐승들에 가로막혀 절망하고 있을 때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나타나 그를 구해 주며 죽어서 우리가 거쳐야 할 지옥, 연옥, 천국을 보여 줍니다. 일곱 개의 연옥과 아홉 개의 지옥을 보여줍니다. 일곱 개의 연옥은 일상에서 버려야 할 행동 몸가짐들이 다 들어 있고 아홉 개의 지옥은 범법 행위들이 가득 찼습니다.

그중에 분노는 양쪽에 다 포진되어 있었습니다. 분노보다 강한 것은 용서라고 합니다. 이렇게 연옥, 지옥문을 통과한 단테는 천국으로 향합니다. 푸른 숲 초원과 레테의 강이 흐르는 그곳에서 소년 때부터 사랑했던 영원한 여성상이었던 베아트릭스를 만나 그녀의 안내를 받으며 열 개의 하늘을 봅니다. 성 베르나르도의 도움으로 아베 마리아의 성가가 울리는 가운데 하느님의 성스러운 얼굴을 뵙고 삼위일체의 깊은 이치를 깨달으며 지복의 경지에 이르는데 단테의 인간적 고뇌와 슬픔, 사랑, 희망이 작품에 녹아 있었습니다.

비록 이루어지지는 못했지만 그토록 사랑하는 여인의 안내를 받으며 천국을 거니는 절정이 그 어디에 있을까요. 실제 인물들이기에 더한 감동으로 빠져드는 시간이었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나의 삶이 그 어디에 속해 있는지도 모르며 살아오다가 자꾸만 연옥에 속해 있는 나의 일상과 지옥에 속해 있는 딱 한 가지가 못내 찜찜해지면서 조금은 우울해졌습니다. 그리고는 은근히 지옥, 연옥의 안내자 베르길리우스를 밀쳐내려고 하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지옥과 연옥과 천국을 넘나들다 말씀의 집 뜰아래 내려서니 마을에는 벚꽃과 매화꽃이 잔잔한 바람에 꽃비 되어 쏟아지고 어디선가 진한 꽃향기까지 날아와 심신을 정화시켜 주는데 성당 옆 뜰 원추리 밭에는 패랭이꽃 제비꽃이 끼어 앉아 유난히 맑은 햇살을 이고 고요의 산 아래에서 저희들도 피정중입니다. 야산 처처에는 높고 낮은 땅에 생긴 원형대로 계단과 산책길을 만들어 명상과 기도를 마음껏 할 수 있었으며 맑고 밝은 지인들의 얘기꽃 웃음꽃은 잠자던 세포를 흔들어 깨웠습니다. 마치 단테가 베아트릭스를 만나 천국을 걸었을 때처럼 행복했습니다. 한편에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성당 안 제대 앞에 앉아 두 손 모으고 눈을 감으니 고요와 평화가 온몸을 휘감아 돕니다. 천국의 안내자 베아트릭스가 살며시 모은 내 손 위를 포개며 다가와 이것이 천국이라고 속삭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자유의지에 의해 선택되는 것, 그리고 각자의 마음 안에 있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온갖 스트레스와 근심, 걱정, 질병, 빈곤으로 인해 세포가 야위어 갈 때는 좋은 말씀과 아름다운 대자연을 통해 생각과 발상의 전환으로 힘을 얻고 내 안의 나를 지킬 수 있는 힘을 키웁니다. 피정은 잊었던 나를 찾을 수 있는 통로입니다. 오늘따라 더욱 청 빛 하늘이 잿빛 나의 시야를 걷어 내어 상쾌한 목욕을 합니다. 마치 쪽빛 하늘이 잿빛 바다를 걷어 내듯이.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김계남(아녜스)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