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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눈] 책무성과 공동선 / 오세일 신부

오세일 신부rn(예수회,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
입력일 2019-09-03 수정일 2019-09-04 발행일 2019-09-08 제 3161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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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사봉공!(滅私奉公)

영화 ‘명량’을 보면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해 침략자들에 맞서 싸운 불굴의 정신과 기백이 드러납니다. 멸사봉공에는 사리사욕 혹은 사욕편정에 휘말리지 말고 나보다 더 큰 우리를 지향하며 공동체의 대의를 세우자는 기치가 담겨 있지요. 대한민국의 근현대사에서 적지 않은 대통령과 정치인들이 이 말을 자주 해 왔지만, 많은 경우 자신과 가족의 이익을 채우며 ‘기득권 유지’에만 힘써 왔습니다. 아직도 수많은 적폐청산과 개혁과제를 안고 있는 대한민국은 책무성과 공동선의 실현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책무성(accountability)이란 사회에서 제기된 중요한 문제에 관해 책임 있게 설명해야 하는 도덕적 의무입니다.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과 2014년 세월호 참사는 우리 역사에서 ‘공적 책무성’의 무게를 뼈저리게 교육시켜 주었습니다! 그 어떤 권력자도 자기의 권력을 함부로 남용해서는 안 되며 부도덕하고 무책임한 지도자들로 인해 무고한 이들이 희생돼서는 안 된다는 깨우침을 죽비처럼 알려줬습니다.

미국의 저명한 사회학자 로버트 벨라는 사회의 책무성이야말로 ‘건강한 사회’의 시금석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저는 개인, 조직, 공공 세 차원에서 책무성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개인의 도덕적 책무성은 시민 개개인이 자신의 도덕적 양심 혹은 종교적 진리에 맞게끔 살아가도록 요구되는 의무입니다. ‘개인의 내면적 양심과 하느님의 계명(天命)에 맞갖게 살아가는가?’라는 질문은 개인의 사적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시민으로서 건강한 정치참여에서 가장 중요한 토대입니다.

둘째, 조직(제도)의 책무성은 공동체 내부에서 발생하는 인권문제나 손실, 부당한 결정 등에 관해서 합당히 대면하고 책임지고 설명해야 하는 의무입니다. 조직의 운용은 공유된 규범과 절차 안에서 전체 구성원의 선익(공동선)을 지향해야 합니다. 조직 책임자가 개인의 취향이나 사적 이익을 우선시하며 법규와 상식에 어긋난 결정을 한다면, 공동체는 병들게 되지요.

셋째, 공적 책무성은 민주국가에서 권력의 남용이나 부정행위로 헌정질서가 침해되는 경우 혹은 공공의 안전과 시민의 기본권이 심각하게 훼손되는 경우, 그에 대한 해명과 대책을 제시하는 의무입니다. 공적 책무성은 공동선과 공익을 지향해야 하는 공직자, 법조인, 정치인, 언론인들의 최우선 과제입니다.

개인의 양심과 도덕은 하느님만이 아실 수 있는 내밀한 지성소이기도 하지만, 한 사회의 문화와 관행 안에서 형성되기도 합니다.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을 지적한 것처럼, 부동산 투기, 로비와 향응(뇌물), 각종 특혜와 편법 등은 우리사회에서 오랜 관행처럼 양심의 가책 없이 통용돼 왔습니다.

하지만, 2017년 촛불혁명 이후 각성된 시대정신은 책무성과 공동선의 빛으로 우리사회의 병폐현상들을 알려주고 있지요. 한 사회가 보다 건강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공공영역에서 책무성의 원칙이 준수돼야 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책무성의 사안을 해결할 때는 ‘사회적 약자에게도 공평하게 힘(기회)을 주는 공동선’의 잣대가 우선적으로 요청됩니다.

기실 오늘날 공적 책무성의 원칙은 ‘악의 평범성’을 더 이상 방조하지 않습니다! 사법농단과 로비향응에 빠져 있는 부도덕한 법조인들, 행정특혜를 몰래 챙기면서 매너리즘에 빠진 행정 관료들, 국민과 공동선에 무관심한 채 당파적 기득권 유지에만 묶여서 정쟁만을 일삼으며 식물국회를 만들어 놓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정치인들, 가짜뉴스를 양산하며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는 각종 언론인들은 역사와 민족 앞에서 뼈저리게 반성해야 합니다.

한편, 책무성의 원칙은 신상털이, 흠집내기, 발목붙잡기처럼 ‘정쟁의 도구’로 전락돼서는 안 됩니다. 여야 할 것 없이 정치인들과 공직자들의 공적 책무성 문제는 ‘기득권이 없는 시민’의 입장에서 접근해야 하며, 특권집단의 기득권에 천착한 정치세력화를 경계하고 공동선에 기반한 비전 안에서 다투어 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역사는 항상 ‘기득권 세력’과 ‘소외된 민초’ 간의 갈등을 통해 변증법적으로 전개돼 왔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변증법이란 유물사관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는 인간의 투쟁이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이 땅에서 정의와 평화를 구현하는 순례의 여정입니다. 특별히 공직자와 정치인들은 자기 기득권을 내려놓고 멸사봉공의 정신으로 공적 책무성을 다할 때 우리 사회가 보다 더 건강하고 정의로워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세일 신부rn(예수회,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