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주말 편지] 선물 / 우희정

우희정 (헬레나) 수필가
입력일 2019-08-12 수정일 2019-08-13 발행일 2019-08-18 제 3158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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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 보세요. 연분홍 자귀꽃이 피었네요. 보드레한 연지 솔 모양의 꽃이 참 어여쁩니다. 우리만 보기 아까워 뒤란의 화분을 대문께로 갖다 놓는 내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던 당신이 추임새를 넣습니다.

“배롱나무 꽃망울도 튀밥처럼 한껏 부풀었던걸.”

그래요. 며칠 지나지 않아 시골 장날이면 ‘뻥이요’라고 외치던 아저씨가 다녀간 듯 빨간 꽃송이가 알알이 팡팡 터질 것 같아요. 이른 봄 영춘화, 산수유를 시작으로 겨울이 깊어질 무렵까지 여기저기서 잇달아 피는 꽃들로 하여 나는 요즘 환희에 차 있습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꿈도 꾸지 못한 일이지요.

당신 알지요?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손바닥만 해도 좋으니 꽃밭 있는 내 집을 갖고 싶었던 가를요. 작은 오두막에 두어 평 정도라도 진짜 땅이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았지요. 그 땅에 과실나무 한 그루 심고 귀퉁이 한 뼘쯤 남겨 도라지와 수국을 심었으면 했지만 애초에 가난한 문사의 형편으로는 가당찮은 욕심임을 잘 알고 있었지요.

어느 날 평소 알고 지내던 지인이 집을 보러 가자고 할 때까지만 해도 상상 못 한 일입니다. 한데 이게 웬일인가요. 우리는 이 집에 반해버렸지요. 첫눈에요. 꿈에도 그리던 정경을 여기서 만난 것입니다. 서른 평도 안 되는 땅에 작은 집 한 채, 뒤꼍의 경계는 창경궁 돌담이 대신 둘러주었고 늠름한 매화 한 그루에 살구, 산수유, 모란까지 딸린 식솔이 여럿이었지요. 뿐인가요, 한 뼘이 아닌 한 아름쯤 되는 꽃밭까지…. 나는 눈이 멀고 가슴이 뛰었답니다. 발그레 상기된 당신도 이심전심인 것 같았어요.

하지만 우리 능력으로는 언감생심 어림없는 일. 그 몇 해 전 근 한 달여를 남의 집을 들여다보며 헛꿈을 키우다 포기한 일이 생각나고 그때 받은 상처가 덧날 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기회만은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 또한 간절했답니다.

집값의 절반 정도밖에 안 되는 경제능력인데 앞뒤 생각 없이 덜컥 계약을 하고는 그 밤 내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 내게 당신은 미안하다 했지요. 사실 나는 그때 분수에 맞지 않는 엄청난 짓을 저지른 것만 같아 겁이 났더랬습니다. ‘만약에 잔금을 치르지 못한다면….’ 생각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해졌지요. 어쨌든 한 달 동안 정신없이 돌아치다 우여곡절 끝에 열쇠를 넘겨받던 날, 이제는 우리 소유가 된 집으로 들어서다 또 한 번 당신과 나, 소스라치게 놀란 일을 기억하나요. 30여 년 전에 지었다는 구옥의 거실 입구 타일에 손바닥으로 폭 감쌀 수 있는 크기의 십자고상이 어서 오라는 듯 마중하던 모습을요. 아! 그제야 주님께서 주신 선물임을 알아챘답니다.

당신이 그날 얘기했지요. 모든 세상사가 우리의 뜻이 아니라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정된 뜻임을…. 오랜 방황 끝에 먼 길을 돌아 뒤늦게 만난 당신과 나, 푸르고 청청하던 시절 다 흘려보내고 인생의 늦가을에야 겨우 인연이 닿은 우리의 만남마저도 그분의 뜻임을요.

우리 두 사람 세상에서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남들보다 적지만 생의 마지막까지 서로를 다독이며 평화를 누리라는 뜻으로 읽습니다.

나는 요즘 소박한 우리의 꽃밭에서 그분의 크나큰 신비를 실감합니다. 당신도 내 마음과 똑같지요? 맞지요.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희정 (헬레나)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