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경교의 동방전래와 그영향] (끝) 원나라시대의 천주교

서영자 수녀ㆍ한국순교복지수녀회
입력일 2019-08-07 수정일 2019-08-07 발행일 1987-01-11 제 1538호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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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의 멸망과 함께 천주교도 점차쇠퇴
한인 신자ㆍ성직자 양성 못한게 주인
명조의 박해로 신자들 순교, 개종하기도
프란치스꼬 회원들의 희생

원나라에서 천주교는 경교와 마찬가지로 원의 멸망과 더불어 절적 되었다. 단지 천주교와 경교가 다른 것은 경교는 원나라 이후 다시 일어나지 못했으나 천주교는 명말(明末)에 다시 중국에 들어와 널리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교황 인노첸시오 6세는 마리노리 신부로부터 중국의 전교 상황에 대하여 보고를 듣고 즉시 프란치스꼬회 총회장에게 서신을 보내어 프란치스꼬회 사제 중에 적임자를 선정하여 원에 파견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프란치스꼬회는 이때 마침「아씨시」에서 총회를 개최하고있는 중이었으므로 즉시 교황의 명령을 수행할 수 없었다.

1362년 프란치스꼬회 야고버 주교가 천주교구 주교로 임명되어 중국으로 가던 중 중아지역에서 다른 전교사와 함께 피살되었다.

교황 울바노 5세는 프란치스꼬회 고스모스 주교를 북경교구 총주교로 임명했으나 출발하기 전에 서거하였다.

그리하여 1370년 동회 귀에 메 주교를 북경총주교로 임명하여 전교사 60여명을 대동하고 중국으로 가던 중 전원이 피살되었다.

교황은 도미니꼬 주교, 콘라드 주교, 야고버 주교, 레오날드 주교, 발도로메오 주교, 진 주교를 중국에 파견하였으나 알렉산더 주교는 중국으로 가던 중 토이기 군대에게 잡혀 7년간이나 포로생활을 하다가 석방되어 중국에 도착하지 못하였으며 다른 전교사들도 중국에 도착하지 못하였다.

원에서 천주교 연멸(煙滅)

원에서 전교하던 전교사는 대부분이 구라파의 프란치스꼬회 회원이었다. 1348년 구라파에 흑사병이 유행하여 프란치스꼬회 회원의 3분의2가 흑사병에 걸려 사망하는 불상사가 일어나 프란치스꼬회에서는 중국에 많은 전교사를 파견할 수 없었다.

중국의 천주교 신자는 대부분이 몽고인 동구라파인 색목인이었고 한인(漢人)은 빈민층으로서 소수에 불과하였다. 한족(漢族) 신자를 많이 얻어야 교회의 기초가 든든한 것인데 대부분이 외국인 신자였다.

천주교는 몽고황실로부터 지지를 얻었으나 중국 본토인을 끌어들이지 못하여 원이 망하자 중국 땅에서 절적되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중국 본토 출신의 성직자를 양성하지 못한데도 큰 원인있다.

명나라가 발흥하면서 천주교를 배척하여 많은 천주교신자들이 정부 난병들에게 피살 되었다. 수도원, 성당은 다 파괴되고 다행히 부사한 신자들은 불교ㆍ도교 등으로 개종하였다.

명의 영락제 이후 정부에서 페관자수(閉關自守) 정책을 썼고 중아 동구라파가 회교국가로 되었으므로 동서교통이 단절되어 천주교 전교사가 중국에 들어 올수 없었다. 그리하여 14세기 말엽에 천주교는 중국에서 절적되었다.

천주교 유적

프란치스꼬회에서 1백 50여년 간 원나라에 많은 희생자들을 내가며 애써 전교한 결과 적지 않은 성당과 수도원, 교회의 공동묘지까지 세우게 되었다.

원이 멸망하고 명나라가 발흥할 당시 전란으로 전교사들이 세운 성당 수도원이 파괴되어 남은 것이 없다.

명나라 초기 황제는 몽고인ㆍ색목인ㆍ이민족에 관계되는 건물은 모두 다 파괴시켰다. 원나라 때의 총주교좌 성당ㆍ수도원 천주교 교회 묘지가 모두 파괴되어 무유(無遺)하게 되었다.

수원성(綏遠省) 백령묘(百靈廟) 부근에서 십자가와 묘석이 발견되었으며 신강(新疆)지역에서도 천주교 신자의 십자가와 묘석이 발견되었다.

천주(泉州)지방에서는 묘석 양편에 천사가 조각되어 있고 9행으로 된 라틴어명문이 있는 보석이 발견되었다.

중일 전쟁 당시 천주성(泉州城)이 파괴될 때 안드레아 주교의 묘석이 발견 되었다.

서영자 수녀ㆍ한국순교복지수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