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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신흥종교] <33> 통일교 <2> 창시자와 연혁 ①

노길명ㆍ고려대교수ㆍ사회학
입력일 2019-08-02 수정일 2019-08-02 발행일 1988-04-24 제 1602호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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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선명 기도중「계시」받고 창시

통일교 경전은 김백문 교리 원용
통일교의 창시자는 문선명(文鮮明)이다. 그의 본명은 문용명(文鮮明)이었으나, 1964년 8월 11일 서울민사지방법원의 판결을 통하여 문선명으로 개명하였다. 그가 개명을 하게 된 것은 그의 본명에 포함되어 있는「용」(龍)이 성서에서는「사탄」을 상징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문선명은 1920년 음력 1월 6일 평안남도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에서 8남매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3세까지는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였으며, 15세에 이르러 비로소 정규학교인 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개신교에 입교하게 된 것은 이 무렵이었다. 그의 입교동기에 관해「통일교회사」에서는 그의 둘째누이와 경기 정신질환에 걸렸기 때문이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문선명은 16세나던 해인 1935년 4월 17일에 예수님으로부터 인류구원사업의 대명(大名)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기도 중에 홀연히 나타나신 예수님은 자신의 인류구원사업이 실패하였음을 설명하면서, 「그대가 아니고서는 이 중임을 감당할 사람이 없다」고 거듭 당부하시므로 그는 몇 번이나 사양하다가 마침내 이 대명을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한다.

19세에 서울에 올라와「경성상공실무학교」전기과에 입학한 문선명은 흑석동에 있는「명수대교회」에 다니면서 유년주일학교의 반사로 활동하였다. 이 교회는 감리교계통의「예수교회」소속으로, 감리교 당국으로부터는 이미 이단으로 규정받고 있었던 신비주의 성향의 종파였다. 이 무렵 그의 관심은「하나님의 창조이상과 인간의 타락과 유구한 세월에 걸친 구원섭리를 중심으로 한 하늘의 심정과 사정을 자신의 것으로 체화(體化)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그는 단군(檀君)의 개국 이념인 홍익인간ㆍ신라의 화랑도정신ㆍ조선조의 정감록예언ㆍ3. 1운동에서 표방되었던 광명대도(光明大道)등과 같은 전래의 도(道)에 주목하면서, 이러한 한국의 전통사상들이하나님의 평화적인 이상과 어떠한 관련을 맺고 있는가에 대해 깊이 생각하였다고 한다. 이 과정을 통해, 그는 한민족은 하나님의 실체와 구원섭리의 역사에 일치된 민족이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사랑을 받는 민족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1941년 일본에 유학하여「와세다대학 부속고등공업학교」전기공학과에 입학하였으나, 2차 대전으로 조기졸업을 하고 1943년 구국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통일교 비판자들은 학교에는 그의 졸업을 입증할만한 자료가 전혀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유학시 일제당국에 저항하는 서클에 가담한 혐의로 인해 1944년 경기도 경찰부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고 한다.

8ㆍ15광복직후인 1945년 10월, 문선명은 경기도 파주군 임진면에 있는 김백문(金百文)의「이스라엘수도원」에 들어가 6개월간 지냈으며, 그 후 이수도원계농의「상도동집회소(교회)」인도자로 파견되었다. 이 수도원 역시 기성교회로 부터는 이단으로 간주되던 신흥종파였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것은 통일교의 경전인「원리강론」이 김백문의 저서인「성서신학」「기독교근본원리」등의 내용과 상당히 흡사하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 비판자들은 문선영이 김백문의 교리를 원용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통일교에서는 양 측의 표절운운은 당치도 않다고 부정한다.

문선명은 1946년 6월 6일 평양으로 월북하였다.

이에 대해 통일교에서는 그가 하느님의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한다. 문선명은 평양에서 교리를 전하면서 전교활동을 하였는데, 당시 그를 따르던 자들은 거의 모두가 신비주의 종파에 소속되어 있던 신도들이었다. 이들은 대부분「하늘의 음성을 듣고, 몽시(夢示)를 보고, 방언(方言)을 하고, 예언을 하며, 옆 사람의 심령을 뚫어보았다」고한다. 또한 이들은 예배 때마다 울면서기도 하였기 때문에 인근에서는 문선명이 이끈 교회를 가르켜「우는 교회」라고 불렀다고 한다.

1946년 문선명은「대동보안소」에 구속되었다가 1백일만에 석방되었다. 이때의 협의는 사회질서혼란혐의였는데, 통일교측에서는 그가 자진 월북한 종교인으로서 이승만의 밀파간첩으로 오해받았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한다. 1948년, 문선명은 다시 구속되어 5년형의 실형을 언도받고 흥남형무소로 이감되었다. 이에 대해 통일교에서는 기성교단의 이단시와 공산당국의 종교말살정책 때문이었다고 설명하는 한편, 비판자들은 그가 유부녀인 김종화라는 여인과「어린 양의 혼인잔치」라는 결혼식을 가져 그녀의 남편으로부터 고소당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2년 8개월간의 옥고를 치룬 문선명은 1950년 11월 유엔군의 진주로 출감하여 부산으로 남하하였다. 그는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하면서 종이를 겹 붙여서 서류철 표지를 만들어 팔기도 하였으며, 부두노동자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부산 범냇골(현범6동 1513번지)의 토담집에 거주하면서 친지들에게 교리를 전파하는 한편, 통일교의 경전인「원리강론」을 집필하였다.

문선명이 피난생활을 하였던 부산 범냇골은 현재 통일교의 성지(聖地)로 전세계 통일교신자들이 일생동안 한번은 반드시 되어있으며, 그가 범냇골 뒷산에 올라가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였다는 바우 또한「눈물의 바위」라는 통일교의 사적지가 되고 있다.

노길명ㆍ고려대교수ㆍ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