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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맛나는 세상 시장사람 이야기 (2) 속초 동명항 어시장

주정아 기자
입력일 2013-05-28 수정일 2013-05-28 발행일 2013-06-02 제 2848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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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같은 넓은 마음들이 출렁이는 삶의 현장
힘찬 뱃고동 소리 활어 경매로 시작되는 생생한 하루
“손님은 잠시 머물다가지만 많은 것 기억하시겠지요”
재래시장, 정과 추억이 그득히 배인 곳이다. 크고 작은 재래시장들은 최근 민속장과 문화관광형시장 등의 특화된 형태로 다듬어지기도 했다. 대형 슈퍼마켓 등장으로 어려움을 겪긴 하지만, 전통 풍물을 만끽할 수 있는 문화관광지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덕분이다. 이러한 특징들은 어플로 정보를 공유하는 스마트폰 세대들에게도 입소문이 나 최근엔 재래시장 탐방과 여행에 나서는 젊은이들도 쉽게 만나볼 수 있다.

전국적으로 산재한 1500여 개(중소기업청 시장경영진흥원 통계)의 재래시장. 그 안에서 장사를 하는 상인들, 오가는 소비자들 모두 다양하고 진솔한 삶의 편린들을 품고 있다. ‘살맛나는 세상 시장 사람들’ 두 번째 이야기 지도는 넓은 바다를 배경으로 자리 잡은 속초 동명항 어시장에서 그려진다.

■ 새벽 경매로 일과 시작

수평선 위에서 밤을 새운 어선들이 하나둘씩 만선의 뱃고동을 울리면 상인들의 얼굴색은 금세 달라진다.

해가 뜨기도 전, 포구 위판장엔 전국 각지로 배달 나갈 트럭들과 중개인들이 이미 대기 중이다. 곧이어 인근 가게 상인들이 리어카를 끌고 숨차게 달려오면 포구엔 긴장감이 가득 채워진다. 특별한 물고기가 그물에 걸렸다는 문자 메시지라도 날아들면 상인들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진다.

배가 들어올 때마다 상인들의 시선은 활어들이 팔딱팔딱 뛰어오르는 수족관으로 일제히 쏠린다. 저마다 누가 볼 새라 냉큼 전표를 채우자, 순식간에 삐익 호루라기 소리가 나며 입찰이 시작된다. ‘얼마에 입찰이 될까?’라는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입찰은 빠르게 끝나고, 한쪽에선 이미 활어들을 옮겨 싣고 내달린다. 또 다른 쪽에서는 100원, 1000원 차이로 낙찰 받지 못한 상인들의 작은 한숨이 나직이 퍼진다.

상인들의 발걸음이 하나 둘씩 돌아서는데 마지막으로 들어온 배에서 상어가 내려졌다. 어린아이 키만 한 대형문어와 곰치에 쏠렸던 시선들도 순식간에 상어로 옮아갔다. 이 입찰마저 실패한 상인들은 재빨리 대포항과 장사항 등의 위판장으로 이동한다.

이어 어부들도 상인들도 정겨운 인사를 나누고 돌아선 자리, 속초 동명항 어시장의 새벽은 동해바다에서 갓 잡아 올린 활어 경매를 시작으로 생생한 삶의 현장이 된다.

동명항 아래에 있는 대포항에서도 매일 새벽 경매가 어김없이 이어진다. 입찰가를 가격에 써 경매를 진행하는 수협직원에게 전달하는 상인들과 입찰된 활어들을 옮기는 어부들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 익숙함과 낯섦의 공존

강원도에서는 바닷가 어디를 가더라도 어항 규모에 따라 크고 작은 어시장이 자리한다. 입에서 툭툭 튀어나오는 말이 다소 거칠어도 접시마다 먹거리를 수북이 채워주는 인심과 웃음만큼은 누구보다 넉넉히 보여주는 상인들이 있는 곳. 이곳 동명항 어시장은 가족 나들이객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는 곳이기도 하다. 최근엔 외국인 관광객들도 많이 늘었다.

동해바다에서 밝은 해가 떠오르는 일출의 고장이라는 뜻을 담은 ‘동명’항은 영동지역 수산물 상거래 중심 어항이다. 일출 감상에 안성맞춤으로 바다 쪽으로 쭉 뻗은 방파제와 영금정 등으로 둘러싸인 동명항은 예전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이 공존하는 대표적인 어항이기도 하다. 옛 포구의 형태는 유지하지만, 매끈하게 다듬은 방파제와 배 모양을 본따 세운 활어센터, 주차장, 입구부터 줄지어선 횟집 등은 근래 들어 늘어간 모습이다.

이곳 어시장은 매주 토요일에 가장 북적인다. 찾아오는 손님 대부분이 외지에 사는 나들이객이기 때문이라고. 인터넷망과 도로 발달로 인해 다양한 생선과 주전부리들을 원거리 택배 등으로 파는 모습도 최근 어시장에서 마주할 수 있는 특징이다.

또 하나, 푸른 동해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진 어시장에서는 누구도 ‘이거 자연산인가요?’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 심지어 타 지역 시장에서와는 달리 자연산이 양식 생선보다 저렴하기까지 하다.

방파제 위에서 바라본 동명항의 모습. 새벽 조업을 마치고 돌아온 배들이 잠시 여유롭게 정박해 있다.

■ 먹거리보다 맛있는 대화

꼭 뭘 사야만 제 맛인가. 빨간 고무대야가 줄줄이 늘어선 난전은 몇 시간을 돌아봐도 지루하지 않다. 어시장 인근에 다다르자마자 코끝에서 퍼지는 비릿한 바다내음과 고소한 생선튀김의 풍미도 그냥 지나치긴 어렵다. 한쪽에서 홍게를 삶는 압력밭솥 추 돌아가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린다. 27년째 동명항에서 감자떡을 만들어 파는 할머니는 포구 주변 사정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는 정보통이다. 시장을 찾는 이들이 수십 수백 번 똑같은 질문을 해도 한결같이 웃으며 가르쳐준다.

아직 손님들이 몰려들지 않은 아침나절에는 동명항 문지기와 같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해녀들과의 대화도 덤으로 얻을 수 있다. 물질을 하겠다는 젊은이들은 없고, 나이 든 해녀들이 세상을 떠나면서 동명항에는 단 4명의 해녀들이 남았다. 이들은 평일엔 온종일 물질을 하지만, 토요일이면 포구에 좌판을 펴고 앉아 손님들을 맞이한다.

남은 해녀들 중 최고령인 좌경순 할머니(79세)는 62년째 속초 연안에서 물질을 하고 있다. 그에겐 매일 뱃고동 소리에 잠을 깨고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큰 낙이다.

주인과 손님이 난전을 펼치기 위해 갓 잡은 활어들을 사가는 할머니들의 움직임도 분주하다.
주말이면 동명항 입구에서 난전을 여는 해녀들은 30년에서 60여 년간 속초 앞바다에서 물질을 해온 이들로, 동명항 역사의 산 증인이기도 하다.

■ 팔도강산에 정직 전하는 부부사장님

동명항 입구에 줄지어 선 횟집들을 지나 중앙부둣길로 내려가면 박민효(라우렌시오·60·춘천교구 동명동본당)·홍성애(라우렌시아·55)씨 부부가 운영하는 횟집이 있다.

이 횟집의 손님들도 80% 이상 전국 각지에서 찾아오는 이들이다. 20여 년째 단골인 손님들도 여럿이다. 가장 신선한 맛과 솔직함으로 봉사하는 부부의 한결같은 마음씨 덕분이다.

최근 온갖 매체들이 맛집 기행 등을 핑계로 홍보를 해주겠다고 나서지만, 이들 부부는 과대홍보에 눈 돌린 적이 없다. 한 켜 한 켜 정직하게 쌓아가는 신뢰를 최우선으로 한다. 그렇게 신뢰와 정을 쌓아가자 부부와 손님들은 서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형님’, ‘아우님’이라 부르며 가족처럼 지내곤 한다.

“손님은 잠시 머무르고 가지만, 많은 것을 보고 기억하신다는 것을 잊지 않아요.”

특히 부부는 손님들이 음식 값을 계산할 때마다 수익금 10%를 따로 모아 독거노인 돌봄을 위해 사용하고 있다.

부부는 지난 18여 년간 정기적으로 노인들을 초대해 싱싱한 먹거리들을 대접해왔다. 3년 전부터는 정말 도움이 필요한 노인들은 움직이는 것조차 어려운 사정을 고려해, 매월 셋째 주 금요일마다 독거노인들의 집으로 직접 찾아가 자연산 전복죽을 대접하고 있다.

“우리가 먼저 베풀면 하느님께서 반드시 갚아주실 것을 믿습니다. 저희가 음식을 통해 하느님 은총을 나눌 수 있는 것은 매순간 갖고 있는 가장 좋은 먹거리를 이웃들에게 대접해드리는 것입니다.”

매일같이 새로운 이웃들을 만나고 헤어지지만, 바다와 같이 넓은 마음 씀을 키워가려 노력하는 상인들 덕분에 시장을 찾는 이들의 마음도 넉넉하게 커간다.

어떤 일을 하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손발 척척 맞춰 움직이는 라우렌시오·라우렌시아 부부는 신앙생활에서도 이웃과의 나눔활동에서도 늘 한마음 한뜻이다.

주정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