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75) 성 요한 보스코 (1)

정영식 신부 (효명고등학교 교장) ,최인자 (엘리사벳·선교사)
입력일 2011-04-05 수정일 2011-04-05 발행일 2011-04-10 제 2741호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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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들의 아버지’로 평생을 몸 바쳐
가난한 고아들모아 교리·생활자립 위한 기술 교육
성인의 박애정신·청소년교육 오늘날까지 이어져
이탈리아 토리노의 한 무덤 비석에는 ‘고아들의 아버지’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비명(碑銘)은 지극히 간단하지만 단순히 몇 마디 인간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다 가신 분이 아니다.

성 요한 보스코(St. Joannes Don Bosco, 축일 1.31). 교회에 어떤 위기가 생기면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어느 성인을 보내셔서 그 위험을 선처하신다. 또 아무리 반대자가 주님의 계획을 파괴하려고 해도 결국 실현하신다. 요한 보스코도 이러한 하느님의 일을 위한 도구였다.

요한 보스코는 1815년 8월 16일 북 이탈리아 토리노교구의 카스텔누오보 근처 작은 마을 베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프란치스코 루이지는 근면하고 열심한 신자였고 어머니 마르가리타도 역시 덕이 충만한 신심 깊은 여인이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급성폐렴에 걸려 34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어머니 마르가리타는 남편이 임종 시에 유언한 “자녀들을 부탁하오. 특히 어린 요한을….”이라는 말을 잊지 않고 요한을 훌륭한 인물로 키우기 위해 밤낮으로 고심했다. 특히 자녀 신앙교육에 대한 열성이야말로 당시 모든 사람들이 “마르가리타는 그리스도교를 믿는 모든 어머니들의 모범이다.”라며 칭찬할 정도였다. 그 때문이었을까. 요한 보스코는 신심깊은 소년으로 자라났다. 9세 때 처음으로 예수의 발현을 보고 성모 마리아를 지도자로 주신다는 고마운 말씀을 들었다. 이후 요한 보스코는 평생동안 성모께 무한한 신뢰를 드렸고, 이는 훗날 수도회 창립 등의 열매로 이어진다.

소년 요한 보스코는 사제가 되기로 마음을 먹는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난 때문에 12세부터 14세까지 2년간 숙부의 집에서 일을 도우며 지냈는데, 이 숙부가 사제의 길을 열어주었다. 신학교에서 6년간 철학과 신학을 연마하는 동안 그는 참으로 완덕을 염원하며 열심히 생활했다. 하지만 그는 완덕에 대한 자신의 열정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했다고 한다. 결국 요한 보스코는 1841년 4월 5일 사제품을 받는다. 첫 미사 때 어머니 마르가리타는 사랑하는 아들을 하느님께 봉헌한 즐거움으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아들에게 말했다.

“너는 오늘부터 하느님의 것이 되었지만, 사제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라는 것을 잠시도 망각하지 말아라. 지금은 이 말을 깨닫지 못하겠지만 언젠가 반드시 깨달을 날이 올 것이다. 오늘부터는 어머니인 나를 염려하지 말고 다만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 열심히 일해라. 나는 네가 항상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이제는 만족한다.”

요한 보스코에게는 훗날 성인이 되는 토리노의 성 요셉 카파소, 성 요셉 베네딕토 코톨렌고라는 두 친구가 있었다. 두 친구는 요한 보스코에게 박애 사업에 일생을 바치라고 권고했다. 요한은 그 충고에 응해 즉시 가련한 고아들을 모아 함께 생활하며 교리와 생활 자립을 위한 기술을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요한 보스코는 고아들의 아버지로 살아간다. 사실 그의 아이들은 온순한 아이들이 아니었다. 요한 보스코가 그들과 함께 생활하자 사람들은 ‘요한 보스코의 왈패자식들’이라고 불렀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이들은 곧 덕이 충만한 성인의 감화를 받고 모두 온순한 아이들이 된다. 요한 보스코는 여기서 더 나아가 양로원이나 교도소 등도 방문하고 그곳에 있는 소외된 이들을 위로하고 도와주며 하느님의 품으로 인도했다.

1864년 고아원이 건설된 후부터 수용한 아이의 수는 매년 급증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요한 보스코는 수도원을 창설해 ‘살레시오 성 프란치스코의 신심회’라고 이름 짓고, 1869년 12월 18일 제자 몇 명을 데리고 당시 교황 비오 9세를 알현, 인가를 청했다. 다시 1875년 8월 5일에는 살레시오 수녀원도 창설했다. 이 두 수도원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적 교육을 베풀어 천국의 영원한 행복으로 인도했으며, 먹고 살아갈 길을 열어 주는 등 현세의 행복까지도 배려했다. 이 두 수도원이 얼마나 당시 사회에 유익이 되었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받았는지 측량하기 어려울 정도다. 이후 전 세계적으로 이 수도원의 혜택을 받은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성인은 1888년 1월 31일 아침 삼종기도와 함께 고요히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많은 공적은 영원히 빛날 것이고, 오늘날도 그 위대한 사업은 그의 애제자인 살레시오회원들의 손을 통해 계속될 것이다.

정영식 신부 (효명고등학교 교장) ,최인자 (엘리사벳·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