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한국교회 창립 선조를 찾아서] 16. 권일신 (4)

입력일 2010-03-09 수정일 2010-03-09 발행일 2010-03-14 제 2688호 4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유배지로 가던 중 자객에 의해 순교
권일신 성현은 모진 고문에도 신앙을 지켰으며 유배지로 이송 중 자객에 의해 피살되며 순교했다. 사진은 권일신 성현 친필.
권일신 성현은 무서운 형벌과 유혹을 이겨냈다. 성현의 신앙은 굳세고 바르고 정확했다. 감옥에서 나왔을 때 상처가 염려되었으므로, 유배지로 떠나기 전에 며칠 동안 서울에 머무는 것이 허락되었다.

그러나 매제 이윤하의 집에서 며칠간 머물며 상처를 치료하고 귀양갈 준비를 하고 있던 성현에게, 정조는 최후 끝까지 권일신 성현의 항복을 받으려고 하였다. 왕으로서의 체면도 있고 한편 학자를 희생시키지 않기 위해서, 왕은 형조의 몇몇 관리들을 보내서 권일신 성현의 80여세 된 노모가 오래 살지 못하리라는 것을 환기시켰다. 일단 바다 저편 제주도에 가면, 어머니의 임종을 아들로서 보지 못할텐데, 두고두고 그 가책을 어떻게 견뎌낼 수가 있겠는가 하며 그 효심을 이용하여 억지 배교 표시라도 하게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배교하라는 말만 하면 권일신 성현이 언제나 분개하여 물리쳤으므로, 그 말은 하지 않고 다만 감형을 얻어 좀 덜 먼 곳으로 귀양갈 수 있도록 왕에게 약간 양보하라고 권고하면서, 권일신 성현께서 강한 반발 대신 좀 묵묵하는 기회를 타서 당시 같이 있던 사람들 중의 하나가 서둘러 그가 쓴 문장에다가 배교는 아니나 약간 양보하는 표시로 글자 하나를 더 추가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서양인들의 종교는 동양의 것과 매우 다르다. 공자와 맹자의 도리는 틀렸고 거짓되다’라는 권일신 성현의 글귀를, “서양의 종교는 공맹의 가르침과 달라서 틀렸고 거짓되다”라고도 해석할 수 있게 만드는데 필요한 ‘늘 어(於)’라는 글자 하나를 더 넣어야 한다고 박해자들이 주장하자, 형벌과 고문에 지칠대로 지친 권일신 성현께서는 “나를 가만 내버려두시오. 그거야 당신들이 하고싶은 것이니, 당신들 하고 싶은 대로 뭘 하든 나와는 상관없소”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박해자들은 이내 그 글자를 더 넣어서, 정조에게 성현의 양보 조작보고를 할 수 있는 뜻이 되게 하였다. 관리들은 권일신 사베리오가 굴복하였다고 왕에게 알리며 호들갑을 떨고 헛소문을 냈다.

글자 하나를 갖고 억지 배교자를 만들어서 승리했다고 자위하는 박해자들의 태도는 실로 가소롭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그 핑계로 유배소는 즉시 바뀌어, 가까운 예산으로 가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성현께서는 이미 받은 형벌 때문에 도저히 거기까지 갈 수 없었고, 1792년 초에 용인군 구성면 구읍(옛날 용인현의 관아가 있던 곳)의 주막에서 귀양길의 첫날밤에 장독(杖毒)으로 몸을 피하거나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서, 뒤따라온 자객에 의하여 타살되었다. 거룩한 순교의 마지막 숨을 거두셨다.

그러나 일설에는 정조 임금이 권일신 성현을 무척 아꼈고 성현을 살리려는 노력이 너무 대단하였므로, 이를 질투하고 또 우려한 박해자들이 자객을 뒤따라 보내어 갖가지 형벌로 지칠대로 지쳐서 초주검이 된 권일신 성현을, 귀양길 첫 주막 밤에 때려서 실신시키고 목을 졸라 죽였다고도 전하는데, 그 이유는 장차 왕이 권일신 성현을 귀양에서 풀어 주거나, 또는 권일신 성현의 제자들과 추종자들의 세력규합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자객으로 하여금 죽였다는 것이다.

성현이 신앙 때문에 순교한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그 당시 조선 관리들이 자행한 형벌과 유혹에도 신앙을 고수하였기에 성현께서는 당시 조선 교우들로부터 사후에도 계속 존경을 받았다.

※ 자료출처 : 천진암성지 홈페이지(chonjinam.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