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신달자의 주일 오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입력일 2009-10-14 수정일 2009-10-14 발행일 2009-10-18 제 2668호 23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시인 박목월 선생님은 사모님을 ‘엄마’라고 불렀다. 물론 그 시절의 남자들은 자신의 아내를 흔히 ‘아무개 엄마’라고 부르곤 했다. 그러나 박 선생님이 아무개 엄마가 아닌 그냥 엄마라고, 그것도 ‘엄마야’라고 부르기도 했다.

원효로 자택을 방문하면 선생님은 늘 “엄마야 신군 왔데이”하시며 반겨주셨다. 먹을 것을 좀 가져 오라는 신호였을 것이다. 처음엔 ‘엄마야’라고 부르는 그 호칭에 당황했었다. 내가 잘 못 들었거나, 혹은 선생님이 당신의 어머니를 저렇게 어른스럽지 못하게 부르시나 싶어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사모님을 그렇게 어리광스럽게 부른다는 것을 이내 알아 차렸다. 계속 듣고 있자니 다정하고 편한 호칭이었다. 특히 엄마라는 단어에 ‘야’자 하나 더 붙인 것이 참 재미있었다. 때론 뭐가 그리 급하신지 “엄마야, 엄마야”하고 크게 부르시는 것을 본 적도 있다. 나도 웃었고, 선생님과 사모님 모두 웃었다. 아직도 선생님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나 역시 남편을 ‘아빠’라고 불렀다. 당시 공적인 자리에서 남편을 아빠라고 부르는 것은 금기시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나는 ‘아빠’라고 불렀다. ‘여보’라는 호칭을 낮 간지러워 할 무렵 아이가 태어났고, 자연히 아빠라는 말이 흘러나오게 된 것이다. ‘아빠’라는 호칭도 ‘엄마’처럼 편하고 다정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인지 나는 남편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를 아빠라고 불렀다. 내 딸들이 아빠를 잃었을 때, 나도 아빠를 잃었다.

나는 남편이 타계하고 나서야 그가 살아있을 때 부르지 못했던 ‘여보’라는 호칭을 글에서 많이 사용했다. 내가 쓴 시에는 ‘여보’라는 단어가 제법 나온다. 그렇게 부르지 못했던 아쉬움이 글에서나마 살아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 남편은 살아서는 ‘아빠’였고, 죽어서는 ‘여보’가 된 셈이다.

내게 아버지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사람이었다. 비록 시골에 살았지만 아버지는 건강과 경제적 여유, 사회적 지위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내며 가장 행복했던 때는 새벽 숲을 거니는 아버지 등에 업혀있던 기억이다. 아마 다섯 살쯤이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등은 편안했고 거기에 업혀있으면 세상의 어떤 불행 따위도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자라서도 잠자리가 불편할 때면 나는 아버지의 등을 떠올리곤 했다. 남편을 먼저 보내고 잠을 이룰 수 없을 때에도 아버지의 등이 그리웠다.

아버지는 1997년 작고하셨다. 그리고 2000년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짧은 시간 아버지와 아빠(남편)를 차례로 잃으면서 가장 슬펐던 점은, 내가 아빠를 잃은 것보다 내 딸들이 아빠라고 부를 사람이 이제 이 세상에 없다는 현실이었다. 그게 왜 그렇게 딸들에게 미안한지 그 생각만 하면 나는 울먹였다. 세상의 딸들이 아빠라고 부르지 못하고 산다는 건 너무 허전한 일이기 때문이다. 음식점이나 길에서 아빠와 딸들이 나란히 혹은 마주앉아 있는 것을 보면 나는 지금도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눈을 돌린다. 가끔 내 귀에 ‘아빠’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리면, 행여나 내 딸들이 그 소리를 들을까 신경을 쓰게 된다.

나는 아버지와 아빠를 모두 잃었지만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아버지 또는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누군가를 갖고 있다. 바로 절대자이신 나의 하느님 아버지시다. 입으로는 ‘아버지 하느님’이라 말하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냥 ‘아버지’라고 부른다. 때론 ‘아빠’ 하고 어리광을 부릴 때도 있다. 그러니 나도 아빠를 잃지 않았고, 나의 딸들도 아빠를 잃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모두 행복하다. 엄마야! 아빠야! 우리 함께 크게 불러보자. 어디선가 ‘오냐’하고 대답하시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