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교구 성지에서 만나는 103위 성인] (6) 요당리성지 성 민극가(스테파노)

이승환 기자
입력일 2009-09-29 수정일 2009-09-29 발행일 2009-10-04 제 2667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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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교·자선활동에 모든 노력 기울여
성인 민극가 스테파노가 성경을 필사하고 있는 모습.
포장이 말했다.

“배교하라. 그러면 석방된다”

민극가는 끝없는 고문에도 지치지 않았다.

“만약에 나를 놓아주면 다시 내 종교를 준행(遵行, 전례나 명령 따위를 그대로 좇아서 행함)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전교를 하겠습니다.”

성 민극가(스테파노, 1787-1840)는 기해박해 순교성인이다. 그는 양반의 후예로 굳고도 온화한 성격과 냉정한 판단력의 소유자였다. 인천에서 태어나 아주 어릴 적 어머니를 여의고 그 뒤 아버지와 형들과 함께 천주교에 입교했다. 교우를 아내로 맞이하였지만 결혼한 지 얼마 안되어 그의 나이 20세가 조금 넘었을 때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

교우들이 재혼하라고 권했지만 그는 혼자 살기로 결심하고 그렇게 여러 해를 지냈다. 그러다 수원 갓등이에서 한 과부와 결혼해 딸 하나를 낳았다. 6~7년 후 새 아내도 세상을 떠나고 외동딸마저 얼마 안가서 죽고 말았다.

이때부터 그는 일정한 주소 없이 부평, 인천, 수원 지방을 다니며 책 베끼는 일로 생계를 이어나갔다. 성인은 교리에 관한 지식이 깊어서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며 많은 이들을 입교시켰다.

자선 사업에 많은 관심을 보였고 전교 활동에 힘쓴 성실함으로 1836년경 유방제 신부에 의해 전교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또 앵베르 주교로부터 수원 양간 송교(현 화성시 서신면 송교리) 전답의 경작권을 위임받기도 했다.

1839년 기해박해로 많은 성직자들이 체포되자 그는 더욱 열심히 전교를 하였으나 그가 경작하는 전답을 빼앗으려고 포졸들과 공모한 배교자 오치서의 밀고로 이듬해 1월 25일, 은신해 있던 서울 근교의 교우 집에서 체포되었다.

체포된 이후 성인은 여러 차례의 고문과 혹형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당하였으나,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오히려 옥중에서 김절벽(도미니코), 이사영(고스마) 등을 포함한 많은 배교자들을 회개시켰다.

성인은 그 후에도 여러 차례 형벌 끝에 1840년 1월 30일 53세를 일기로 교수형을 받고 옥중에서 순교했다. 성인은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됐다

천주가사 ‘삼세대의(三世大義)’는 민극가 스테파노 성인이 지은 것이다. 신자들이 삼세(천당?지옥?십계(현세))의 의미를 잘 새겨 현세에서 교리를 실천해 내세에 천당에 갈 수 있도록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기 위해 저술했다.

‘삼세대의’는 죽음 앞에 선 인간의 무력한 모습을 시작으로 천주의 천지창조 내용, 아담과 이브의 창조와 추방, 노아의 홍수, 아브라함,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는 내용,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과 전교, 예수의 기적, 그리스도의 수난과 십자가에서의 죽음, 예수 부활과 승천, 성령강림 등 모든 교리가 제시된다. 마지막 부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에 대한 내용과 천주께 의지하여 정신적 구원을 얻도록 기원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성인이 ‘삼세대의’를 창작한 것은 회장에 임명돼 전교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신자들의 신심 함양을 위한 쉬운 우리말 가사가 필요했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성인이 활동한 교우촌 양간공소 자리인 교구 요당리성지(www.yodangshrine.kr) 순교자묘역에는 성인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이승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