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대희년을 배웁시다 (34) 교구와 본당에서의 희년

박영식 요한 신부(가톨릭대학교 교수)
입력일 1999-11-28 수정일 1999-11-28 발행일 1999-11-28 제 2178호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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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과 화해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
외적인 참회는 내적인 회개 동반돼야
단식·희사 등 나눔행위는 참회의 표시
대희년을 맞아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위해 교구와 본당에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이 점에 대해 우리는 교황 바오로 6세께서 1975년의 희년을 기념하면서 『인간을 그 내부로부터 새로 태어나게 해야 한다』라고 지적하신 말씀을 기억할 수 있겠다. 인간이 내적으로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참회와 고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주님의 은총의 해인 「성년」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우선 하느님과 화해하고 아버지 하느님의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느님의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방탕한 아들처럼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루가 15, 18)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가 죄를 고백한다면 그분은 진실하고 의로우시니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온갖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실 것이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그분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며 그분 말씀이 우리 안에 계시지 않는 것이다』(1요한 1, 8~10). 구약성서에서는 종교인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 참회라고 가르친다. 경건한 유대인은 죄를 지은 뒤에 하느님의 분노를 가라앉히고 그분의 은총을 받기 위해 참회했다. 그렇지만 외적인 참회에는 언제나 내적인 회개, 곧 하느님과의 대화를 계속하기 위해 잘못된 길을 버리려는 굳은 결심이 동반되었다. 단식을 하거나 희사를 한 것은 하느님을 다시 만나고자 하는 인간의 이러한 염원에 대한 참회의 표시가 되었다. 이렇게 볼 때, 구약성서에서도 참회는 이미 하느님의 사랑을 회복하고 그분을 온전히 신뢰하는 개인적인 종교 행위였다.

그러나 참회가 갖는 사회적인 차원도 있었다. 하느님 백성의 일원이라고 하는 것은 한 개인으로서만이 아니라 모든 이와 연관된 것이다. 그래서 구약성서에서 「야훼의 가난한 자」들은 그들 자신만이 아니라 전체 백성의 성화를 위해 참회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와 교회 안에서의 참회가 가져다 주는 풍요롭고 충만한 의미에 비해 이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전 인간을 변화시켜야만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나라에 속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죄 없으신 분이지만 인간 본성을 그대로 받아 들이셨고, 다른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짐으로써 당신을 따르는 이들의 참회의 길에 새로운 빛을 던져 주신다. 초기 교회에서 세례받은 그리스도인은 모든 죄로부터 깨끗해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하느님과 교회 앞에 계속해서 참회했다.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르게 사는 것이며 어떻게 세상 사물을 사용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를 아는 것을 뜻한다. 오늘날에도 참회하는 것은 이 세상의 것에 노예가 되지 않는다는 것과 살아계신 하느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기에 자기 자신을 비우고 사막으로 만드는 참회의 과정이 없이는 진정한 회개가 있을 수 없다. 세상과 인생의 여러 가지 소음들에서 멀리 떠나 하느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은 유혹에서 멀리 떠나는 것이 아니라 시련에 직면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영혼의 침묵 중에 자신만의 시간을 갖고 주님께서 나에게 다가오실 수 있는 길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요한 세자가 외친 것처럼 『주님의 길을 닦고 굽은 길을 바르게 하는 것』(루가 3, 4)이다. 주님의 길을 준비한다는 것은 죄의 사함을 받기 위해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만이 아니라, 특히 『회개에 합당한 열매』(루가 3, 7)를 맺는다는 것을 뜻한다.

박영식 요한 신부(가톨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