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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면희 교수의 생명칼럼] 9.환경정의 실현의 필요성

입력일 2008-03-16 수정일 2008-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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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를 넘는 자연수탈 제어 돼야

하루가 멀다 하고 환경 관련 소식이 각종 언론매체를 통해 보도되고 있다. 작년 하반기부터 금년 초까지 세계 곡물가격은 지속적으로 오르고 있다.

원유 가격도 마찬가지여서 현물시장에서 이미 1배럴당 100달러를 넘어선 강세가 지속되고 있다. 전통의 선진국 이외에도 신흥 개도국의 경제가 성장하고 있으니 당연한 추세다. 특히 인구 14억과 11억의 규모인 중국과 인도가 보다 많은 식량과 자원을 필요로 하니 불가피하게 보인다.

환경문제는 우리에게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다가오게 된다. 하나는 석유와 같이 재생 불가능한 자원이 고갈 단계로 접어들어서 미래세대의 필요를 잠식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또 다른 하나는 산업사회의 생활양식에 따라 자연에서 자원을 채취하여 상품을 생산하고, 유통 및 소비하며, 끝으로 폐기하는 일련의 과정과 귀결로서 환경오염을 발생시키거나 자연에 대한 과부하를 가중시킨다는 점이다.

지난 3월 5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세계 각 나라가 현재의 정책을 고수할 경우, 2005년 469억톤이던 온실가스 배출량이 2030년에는 37% 늘고, 2050년에는 52%가 증가한 714억톤에 이를 것이라고 예측했다. 향후 기후변화에 따른 폭풍과 홍수, 폭염과 가뭄 등이 보다 빈번하게 내습할 것이다.

2030년에는 무려 39억명 이상이 물 부족 상태에 직면하여 고통을 겪게 되고, 2050년에는 지구 평균기온이 산업화 이전과 비교하여 1.7~2.4도 정도 높아져서 지구 현기증에 따라 상상할 수 없는 재앙이 지구촌에 닥칠 것으로 전망된다.

문제는 해결책을 모색해야 하는데, 그것이 현상적인 것에 그칠 뿐 구조적인 데 미치지 않으며, 이 과정에서 자연과 더불어 사회적 약자 집단이 우선적으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남태평양 섬나라 투발루군도 주민들은 자연에 의지하는 전통적 생활을 영위해왔지만, 선진국이 산업화로 배출한 온실가스가 지구 해수면을 높이는 바람에 조국을 등지고 어딘가로 더부살이를 떠나는 형편이 되어 있다. 곡물 가격 폭등으로 인해 가난한 나라와 사회적 약자가 받는 고통도 날로 가중되고 있다. 대체 에너지로서 에탄올 연료인 옥수수가 각광을 받으면서 시카고 상품거래소에서 2005년 말 기준 부셸(27.2㎏)당 2달러인 것이 2년 후에는 4.20달러가 되었다. 또한 다른 곡물 재배지를 옥수수 밭으로 바꾸는 바람에 밀과 쌀 등의 곡물 값도 오르고 있다. 2007년 초에 비교하여 연말에는 국제 밀과 쌀 가격이 각각 80%와 30% 넘게 올랐다. 선진국과 부자야 미동도 하지 않겠지만, 후진국과 빈자는 가난과 빈곤, 영양결핍의 나락으로 내몰릴 수 있다. 환경문제가 깊어질수록 환경 부정의도 심화되는 양상인 것이다.

진리가 사상체계의 첫째 덕목이라면 정의는 사회제도의 으뜸 덕목이라고 할 수 있다.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은 인간의 이타심이 제한적이어서 누구나 사회적 산물을 많이 확보하고자 욕심을 내지만 사회가 자연을 이용하여 확보하는 자산이 부족할 때 바로 정의가 요청된다고 역설한 바 있다.

이때 정의는 사회적 산물의 분배와 관련하여 구성원 누구나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동의할 수 있는 사회제도의 규제적 규범인 셈이다.

전통적으로 사회적 혜택의 분배를 위한 합리적 제도 구축이 문제가 되었다면, 환경위기의 시대에는 혜택과 더불어 환경적 부담의 공정한 분배까지도 포괄하는 새 지평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그래서 사회정의를 넘어 환경정의가 태동했다. 누구나 환경상의 부담을 최대한 받지 않으려고 애쓰기 때문에 부담을 수반하는 혜택도 연동 속에서 공정하게 분배되어야 한다. 이렇게 환경정의가 제도적으로 구축되면 자연스럽게 도를 넘어서는 자연수탈은 제어되고, 식량과 같은 사회적 산물도 인간으로서 누구나 존엄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재조정될 것이다.

인류가 정의의 사표로서 가난한 이를 대변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자세를 따를 때 비로소 사회 및 환경문제를 제도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단계로 올라설 수 있음을 바르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한면희(프란치스코·전북대 교수)